읽고 싶은 이어령 中
<한국어로 본 한국인> (1) 이어령
--- 읽고 싶은 이어령 中
강 일 송
오늘은 이어령박사의 책을 한 번 보겠습니다. 지난 번에 에디슨과 테슬라
이야기를 통해 이어령박사의 책을 소개해 드린 적 있었고 오늘은 두 번째입
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이라고 흔히 이야기합니다. 말이나 글만 보아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 인품 등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하지요. 가끔은 글과는
전혀 딴판인 사람도 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오늘은 우리말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보는 글입니다.
한글은 참 과학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말들을 본다면 수와 논리
에 맞지 않는 말들도 많고 표현이 두루뭉실한 것들도 많습니다.
본문에 나올, 두서너 개 란 말도 그렇고, 거시기하다, 걸쩍지근하다, 등등
영어로 옮긴다면 표현이 어려운 것들도 많지요.
오늘은 그러한 우리말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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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발달할수록 짧아진다.
해방 직후에는 “양키 담배”라 했던 것인 어느새 “양담배”라고 줄어든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옛날 고대어나 윈시부족의 말일수록 뱀 꼬리처럼
길고 복잡한 단어들이 많다.
“Taumatahakatangilhagkoauauolamanteapokaiwhenvakitanahatu"
라는 뉴질랜드의 산정상 이름은 열차처럼 길고 길다. 이것이 한 단어니
그 이름만 부르려고 해도 산꼭대기에 오른 것처럼 숨이 막힐 것 같다.
◉ 단음절인 몸에 관계되는 낱말
우리나라 단어들은 1박자 아니면 2박자로 모두가 짧고 간편하다.
“긴 단어는 야만의 지표다” 라는 예스페르젠의 정의만 가지고 본다면
우리는 단연 이웃에 있는 일본보다는, 영,미인들보다는 문화민족이다.
우리나라의 단어는 세계 어느 말보다 짧다고 한다.
인체어를 두고 생각해 보면, 몸에 관계된 말은 거의 단음절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몸”이란 말에서 시작해서, 눈, 코, 귀, 목, 입, 배, 젖,
손, 발, 팔, 이 ....... 에누리 없는 1박자다.
물론 예외가 있어 두 음절짜리가 있지만 그것은 머리, 다리, 허리처럼
그것들대로 규칙적인 꼬리를 가지고 있어 결코 복잡하지 않다.
우리말의 머리, 다리, 팔과 발처럼 서로 대응성을 가지고 있는 예는 어느
나라 말에서도 찾기 힘들다.
단음절로 이루어진 한국어의 인체어를 보면 우리는 예부터 몸을 기본
의식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아픔
한국어는 아픔의 언어이다. 우리에겐 아픈 것을 치료하는 약보다도 그것을
표현하는 말이 더 풍부한 것 같다. 단테도, 셰익스피어도 아픈 것에 관한
한 한국인만큼 속시원하게 표현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골치가 아프다” “배가 아프다” 등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도와 그 증상에 따라서 아픔도 가지가지다. 술을 마시고 아침에
일어나서의 두통은 머리가 “멍”하게 아픈 것이고, 연탄가스라도 마셨으면 “띵”
한 것이다. 신경성일 경우에는 골치가 쑤신다고 하고 좀 더 엄살을 부리자면
욱신욱신 쑤시는 것이다.
삭신이 쑤신다는 말은 외국어로 또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병이 나기 전에
“노곤하고, 녹작지근한”것이 다르고 나른한 것과 뻐근한 것이 다르다.
왜 이렇게도 고통의 말이 발달했을까. 왜 이렇게 아픔에 대해 민감했을까.
다른 민족보다도 고통을 많이 겪어 왔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한국어의 특성이 논리보다는 감성이나 정감쪽으로 발달해왔기 때문
이라고 생각한다. 논리보다는 매사를 기분으로 해결하려 든다.
그만큼 시적(詩的)인 국민이기도 하다.
약보다도 고통의 말이 더 발달하고 풍족한 민족, 이런 글을 쓰다 보니 정말
가슴이 ‘뻐근’해진다.
◉ 두서너 개
누군가 양말을 사고 있다. 점원은 “몇 켤레 드릴까요?”라고 묻는다.
손님은 “한 두서너 켤레만 주세요”라고 대답한다. 점원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몇 켤레의 양말을 내놓는다.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점쟁이들의 거래처럼 신기한 일이다.
“두서너 개”란 말은 두 개, 세 개, 네 개를 두루뭉수리로 합쳐놓은 말이다.
여기에 “한”까지 붙이면 무려 하나에서 넷까지의 수를 한꺼번에 나타내는
말이 된다.
한국인만이 이해하고 또 생활하고 있는 이심전심의 숫자요, 말인 것이다.
“두서너 개”란 말 속에는 숫자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한국인의 마음이
숨어 있다. 정이나 사랑이나 인생은 언제나 컴퓨터가 무력해지는 “두서너
개“의 수치, 어렴풋한 그 안개 속에서 자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두서너 개”란 말은 에밀레의 종소리처럼 여담이 있는 한국적인 숫자요,
그 마음이다.
◉ 살다와 죽다
‘ㄹ’ 음이 붙은 말은 거의 모두 유동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물과 구름은 흘러가고 바퀴는 돌아가고 굴러간다. 의태어나 의성어를
보면 더욱 분명하다. 바람이 부는 것은 ‘솔솔’,‘살랑살랑’ 이고 물이 흘러
가는 것은 ‘좔좔’,‘찰랑찰랑’이다.
그런데, 반대로 무엇이 정지되어 있는 것이나 운동이 멈추는 것에는 ‘ㄱ’음이
붙어 있다. ‘꺾이고, 막히고’ 부딪치는 것들은 에누리 없이 폐쇄음으로 끝난다.
“딱” 멈춰 선다고 하고 “꽉” 막혔다고 그리고 떡“ 버티고 선다고 한다.
이러한 ‘ㄹ’과 ‘ㄱ’의 대응을 대표하는 말이 ‘살다’와 ‘죽다’라는 말이다.
‘살다’는 생명이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요, 바퀴처럼 굴러가고 돌아가는 것이지만
‘죽는다’는 것은 그 목숨이 막히고 꺾이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살다’는 ‘ㄹ’
음이 붙어 있고 ‘죽다’는 ‘ㄱ’음으로 끝나고 있다.
한국인은 유난히 “죽겠다”는 말을 잘 쓴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
직장에서 돌아오자마자 피곤해서 죽겠다라 하고, 좋아도 죽겠다고 하고, 슬퍼도
죽겠다고 한다. 우스워도 죽겠고, 재밌어도 죽겠다는 것이 한국인이다.
심지어 생물만 죽는 것이 아니다. 시계도 죽고, 불도 죽고, 맛도 죽는다.
우리가 죽는다는 말을 잘 쓰는 것은 그만큼 죽다란 말이 살다란 말과 잘 대응이
되기에 정지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다는 극치의 넓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ㄹ’과 ‘ㄱ’ 그것은 삶의 두 가지 음양(陰陽)을 나타내는 한국인의 철학이기도 하다.
◉ 그냥
칸트는 매일매일 일정한 시각에 맞추어 산책을 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시계를
맞추었다고 한다. 우리 눈으로 보면 참 멋이 없는 산책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특별한 볼일이 있어 걷는 것이 아니라 꽃을 보면 멈추기도 하고, 이슬을 밟다 보면
그 코스가 빗나갈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렇다. 우리는 ‘그냥’이라는 말을 애용한다.
그냥 들렀다든지, 그냥 만나고 싶었다든지, 매사의 행동에 그냥이란 말을 붙여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논리적으로 보면 말이 안 된다.
그냥이란 말은 이유와 동기를 거세하는 말이다. 우리는 서양 사람들처럼 일일이
이유와 동기를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활과 행동에서 뚜렷한 목적과 이유를
부정하려는 마음이 강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이유 없는 행동을 동경한다. 그냥 그대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삶의 이상
이었다. 인과(因果)에서 해방되는 것, 그것이 한국인의 자유며, 멋이며 소요(逍遙)
의 정신이었던 것 같다.
빵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듯이 인간은 이유와 필연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때로는 모든 계산과 이유에서 벗어나 그냥 살 줄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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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은 우리를 나타내고 보여주는 가장 큰 도구입니다.
말은 참 다양합니다. 우리나라같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도 함경도 토박이와
제주도 토박이가 만나면 전혀 대화가 힘들 지경입니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 살아도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의 언어가 상당히 다릅
니다. 저도 사춘기 딸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게 뭔 소리야? 라고 물을 때가
많으니깐요.
"생파"가 생일파티, "쌍수"가 쌍꺼풀 수술 인 것도 최근에 알았네요. 헐~
언어가 발달할수록 짧아지고 단순해진다는 것과 우리말이 단음절로 된
문화적(?)인 단어가 많다는 사실은 이 책을 읽고 배웠습니다.
숫자를 표현하는 것도 영어보다 우리가 훨씬 단순하고 편리하게 표현되기에
한국인이 미국인보다 수학이 뛰어나다는 분석도 있었지요.
그리고 우리말은 아픔의 말이라고 합니다. 아픈 것을 표현하는 감정의 단어가
많은 것이 우리말이 이성보다는 감성이 풍부한 쪽으로 발달해서라고 합니다.
색을 표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란색도, 노랗다, 누렇다, 누르스름하다,
노르끼리하다, 샛노랗다, 등등 아주 다양합니다.
셈하는 데 가서는 더욱 심하지요. 한 두서너댓개 주세요. 그래도 우리는 대충
다 알아 듣습니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숫자에서 자유스러워지려고 하는 마음
과 우리네 정같은 것이 딱 부러지지 않은 어렴풋한 그 안개속에서 얻어진다고
하는 저자의 말은 탁월합니다.
흐름과 막힘을 표현할 때, 'ㄹ'과 'ㄱ'의 역할을 보면 우리말이 참 과학적이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냥"이라는 말도 이유와 원인이 딱 부러지는 서양과 달리, 자연스럽고 인과
관계에서 좀 벗어난 여유를 찾으려는 우리 국민성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 예술에서도 자유분방성과 대충에 가까울 정도의 자유함을 추구하였듯이
언어에서도 그러한 성향이 어김없이 나타난 것이라 보여집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