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로 본 한국인 中
<차나 한잔 합시다, 어쨌든> 이어령
-- 읽고 싶은 이어령, 한국어로 본 한국인 中
오늘은 우리말을 통해서 본 한국인, 우리의 자화상을 지난 번 이어서
한 편 더 보기로 하겠습니다.
지난 1편에서 한국어는 짧은 단음절의 문화어라고 하였고, 아픔의 언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서너 개처럼 숫자에서 자유스러워지고 싶은 여백이
담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고, 이유와 필연만으로 살 수 없는 삶을
표현한 “그냥”의 철학을 보았습니다.
오늘도 몇 가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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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나 한잔 합시다.
우리는 언제나 말끝마다 ~~나, ~~나, 를 붙여서 말을 잘 한다.
“차나 한잔 합시다.” “바둑이나 한 판 둘까?”
“집에나 들어가서 잠이나 자자.” 등등.
그냥 말을 해도 될 텐데 왜 꼭 말끝마다 ‘나’자를 붙여야 시원한가?
별 뜻 없이 무심코 말하는 소리지만, 그것을 분석해보면 우리 잠재의식
속에 그만큼 생활의 불만이 가득히 괴어 있다는 증거다.
“~~나”는 소극적인 선택이며 도피적인 언사인 것이다. “집에나 가서 잠이나
잔다“는 것은 곧 다른 데 가봐야 별 수 없다는 뜻이며, 또 집에 들어가서도
신통한 일이 없으니 잠을 자는 것이 속 편하다는 불만의 토로다.
요즈음엔 “이민이나 갈까?”, “미국이나 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민이나’, ‘유학이나’ 하는 투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민을 가도 그 어디를 가도 결코 잘살 수 없는 사람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순간순간 주어진 일들을 불사르려는 열정, 티끌과 먼지라도 사랑하려는
의지, 이러한 능동적인 행동으로 인생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나, 의
비극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마음을 다해서 노력을 하는 사람은 ‘나’자를 쓰지
않는다. 우리의 말투에서 ‘나나’의 관습어가 가시는 날, 우리에겐 정말
충족된 생을 살 수 있는 그날이 올 것이다.
◉빼닫이
문이란 것은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이 양면이 합쳐져서
하나의 문이 된다. 그런데 영어로 써 놓은 것을 보면 “EXIT" 아니면
“Entrance"로 되어 있다. 들어가는 것과 나가는 것을 하나로 보지 않고
독립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입구”라는 편리한 말이 영어에는
따로 없는 셈이다.
엘리베이터도 마찬가지다. 어원적으로 보면 ‘높이 올라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문자 그대로 보면 엘리베이터는 올라갈 수는 있어도 내려올 수는 없는 것이
어야 한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책상 서랍을 영어로 “DRAWER"라고 부른다는
것은 중학생만 되어도 다 안다. 그런데 빼기만 하고 닫는 개념이 없다.
우리는 이것을 빼닫이라고 한다. 우리말에는 서로 상반되는 개념을 하나로
묶은 단어가 많다. 여닫이, 미닫이, 드나든다, 들락날락, 오르락내리락,
왔다갔다, 오락가락, 보일락말락, 하는 둥 마는 둥, 먹는 둥 마는 둥...
서양의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흑이면 흑, 백이면 백이어야 한다는
논리에 의존해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한쪽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선조들의
슬기는 인생을 오는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아닌 오락가락하는 양면성으로
바라본 데 있는지도 모른다.
◉ 어쨌든 이란 말
남들이 말하는 것을, 혹은 문장을 유심히 관찰해 보라.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어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쨌든’이라는 부사다.
“어쨌든 좋지 않다.”, “어쨌든 해야 되겠다.” 무엇인가를 부정하든 긍정하든
우리는 무엇을 강조할 때, ‘어쨌든’이란 말을 흔히 쓴다.
대체 어쨌든 이란 그 부사는 무엇인가? 장황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이유 이전이며, 논증이나 사고를 추방하는 ‘곤봉’같은 말임에는 틀림없다.
이 말은 일방적인 폭력, 비판을 허용치 않는 독재의 언어이다.
한국적 풍토 중에서 지성을 억누르는 가장 큰 정신적인 풍토를 찾으라면,
“어쨌든”이 지배하는 논리의 학살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은 “왜?”라는 지성
의 싹을 짓밟았다.
한국의 교육은 ‘어쨌든’의 일방통행이다. 선생은 학생 앞에서 언제나 ‘절대적
으로 옳은 존재‘이고 질문은 그 지엄한 권위를 건드리는 것으로 일종의 터부다.
위정자와 대중과의 관계, 관과 민의 관계도 그렇다. 백성의 주장을 그들은
곤봉의 언어인 ‘어쨌든’으로 눌러왔다.
윤리, 문화, 정치, 경제 모든 것이 어쨌든의 판정승으로 돌아간다.
이런 한국의 풍토 속에서 지성은 꽃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더욱 지성이 필요하다는 역설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지성은 어쨌든에 대항하는 화살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하여 지성의 숨구멍을 트이게 한다는 것일까?
첫째로 우리는 결론을 서두르지 말자는 것이다. 성급하고 안이하게 결론을
내리려고 하기 때문에 어쨌든이란 말이 판을 치는 것이다. 그것이 지름길이
아니어도 좋다. 어떠한 문제에 도달하기 위해서 지루하고 위험하며 고통스러운
항해를 거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로는 ‘어쨌든’ 대신에 ‘왜’라는 말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지성은 ‘회의의 씨앗’이라고도 한다. 맹목이야말로 지성의 적이다.
셋째로 폭력을 거절할 줄 아는 용기야말로 어쨌든을 꺾고 지성이 승리하는,
지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결론이다.
지성이 잠들어 있는 곳에 폭력이 온다.
우리는 오랫동안 감정으로만 세상을 살아왔다. 행동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은 오직 감정의 뜨거운 숨결뿐이었다.
감정은 전염병처럼 전파되는 것이기에 자신의 주체성을 깎아내리기 쉽고,
옳고, 그른 판단을 흐리게 하기 쉽다.
가정, 학교, 사회, 그리고 국가.... 이 모든 한국의 풍토는 결코 결정지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바꿀 수 있다는 무한한 자유를 지니고 있기에 비로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는 것이다.
다시는 어쨌든이라는 강압과 판단 중지를 강요하는 악센트에 복종하지
말자. 그것이 바로 한국의 풍토와 지성이 관계를 논하는 시작이요,
또한 끝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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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잔 합시다, 어쨌든, 이 말들은 우리 일상에서 참 많이 쓰는 말들
입니다. 크게 생각 없이 쓰는 이런 말에도 깊은 의미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우리 잠재의식 속에 불만이 많기에 자기도 모르게 “나”를 많이 붙인다합니다.
이 말은 능동적, 적극적 사고를 할 때 우리 곁에서 저절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두 번째의 빼닫이, 미닫이, 오락가락 등등 , 상반되는 뜻을 합쳐놓은 단어가
우리말에는 많은데 영어는 엘리베이터, 드로워, 엔트런스 등 하나의 개념만 사용하는
단어가 많네요.
세 번째는 어쨌든 이란 말입니다.
저자는 논증이나 사고를 추방하는 독재의 언어라고 합니다. 곤봉의 언어,
일반통행의 언어입니다. 어쨌든을 많이 쓰는 사회는 소통이 불가합니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그래왔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 해결 방안으로 서두르면서 급하게 결론을 내지 말자고 합니다.
그리고 “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면서 지성의 풍토를 만들자고 하며,
마지막으로 폭력을 거절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지자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더욱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밀어 붙이는 의사결정, 민의를 수렴하지 않는 일방통행의
행정, 다른 사람의 다름을 인정해주지 않는 배려 없음의 전근대적인
문화를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