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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08. 2016

<시(詩)의 문장들>❶

김 이 경

<시(詩)의 문장들>❶   김이경
-- 굳은 마음을 말랑하게 하는 시인의 말들

                          강 일 송

오늘은 시(詩)에 대한 독특한 책을 한 번 보려고 합니다.
저자는 시를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시를 어릴 때부터 가까이 하고 즐겨
읽어 왔으며, 소설, 독서법에 대한 책, 평론집 등 다양한 인문학 서적을
집필한 숨은 실력자입니다.

시를 읽다 보면 어떤 문장에 오래 눈길이 머문 경우가 있고, 한 줄짜리
문장에 가슴이 쿵 내려앉을 때도 있으며, 시의 제목과 작가는 다 잊었지만
구절만은 남아서 평생 잊히지 않을 때가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힘들게 쓴 시인에 대한 예의는 아니지만, 결례를 무릅쓰고 뒤통수를 한 대
맞았는데 머리에서 분수가 솟는 듯한, 이런 청량함을 전하기 위해 이 책을
바친다고 합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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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 <꽃>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비, 1996

-- 초등학교 때 책상 한가운데 금을 긋고 “넘어오지 마!” 하고 티격태격
하던 기억 때문일까. “경계”라고 하면 무조건 너와 나를 , 안과 밖을,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서슬 퍼런 금부터 떠올랐다.
그 경계가 나와 너의 사이, 안과 밖의 사이, 우리와 그들의 사이이기도 한
것은 몰랐다. 
그 사이에서 꽃이 핀다는 걸 몰랐다.
시인의 놀라운 상상력이 아니었으면 죽을 때까지 몰랐을 것이다.  만날
편 가르기나 하고 보초나 서면서, 온 세상 꽃들이 다 시들도록 전전긍긍
호시탐탐 늙어 갔을 것이다.


◉ 모든 국은 어쩐지 슬프다
  김영승, <슬픈 국>, 세계사, 2008

-- 세상에, 국이 슬프다고!
“냉이국이건 쑥국이건/ 너무 슬퍼서// 고깃국은 발음도 못하겠”단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적힌 시를 읽다가 웃었다.  웃다가 눈꼬리에 달린
눈물을 누가 볼까 얼른 닦았다.
혼자 끙끙 앓다가 식은 밥을 끓여 먹던 어느 봄날, 툭하면 배앓이를 하던
나를 위해 어머니가 끓여 주던 아욱국 생각이 나서 뚝뚝 눈물 흘리던 것이
떠올랐다.  그 어머니 곁을 그토록 떠나고 싶어 하던 내가 떠올랐다.
아, 국은 슬프구나!


◉ 하지만 오늘은 너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구나
  신해욱, <보고싶은 친구에게> 문학과지성사 2009

-- 시인이 어릴 적 친구를 생각하며 쓴 시의 한 구절.
시인의 친구는 뎔 두 살 때 담임에게 두 뺨이 달아오르도록 따귀를 맞았
다고 한다. 평소에 한 번도 칭찬을 듣지 못했고 그러다 열 네 살에 큰 물에 
빠져 죽었다 한다.
내 친구들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공장에 간 친구, 교복 입은 나를 보고 저만치서 담장 뒤로
숨던 친구, 행상하는 어머니와 광부 아버지를 걱정하던 내 짝궁, 어린 동생
을 업고 집안일을 하느라 숙제를 못해 와서 툭하면 출석부로 쾅쾅 머리를
맞던 친구.
내 삶의 많은 시간들은 그 애들이 빌려준 것인데....


◉ 내 몸은 아버지보다 늙었다 아버지
  빅진성, <나는 아버지보다 늙었다>, 천년의 시작 2012

-- 모처럼 아버지를 뵈러 갔더니 오빠가 와 있었다. 파킨슨병으로 손을 떠는
구순의 아버지께 머리가 허옇게 센 오빠가 찻숟가락으로 양갱을 조금씩 떠서
먹여 드리고 있었다. 평소 늙은 아버지에게 입바른 소리를 잘해 내가 흰눈으로
보던 오빠였다. 나는 잠자코 방문을 닫았다. 어쩌면 내가 뭔가를 모르고 있는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볕 좋은 가을 아침, 아버지는 세상을 뜨셨다.  아흔의 나이에도 신문
네 가지를 챙겨 보며 세상을 분석하고 앞날을 대비하시던 아버지.
세상엔 아직 내가 모르는 일이 너무나 많고 내 좋은 스승은 이제 여기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보다 작아진 몸으로도 태산 같은 가르침을 주셨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는 괜찮다, 괜찮아야 한다. 괜찮고 말고....  


◉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김수영,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민음사, 2003

-- 열여덟,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키득키득 웃었다. 고깃국에 고기는 없고
비계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시인 아저씨가 우습기도 하고 시인이란 사람은
나랑 다른 줄 알았는데 비슷하구나 싶어서 가깝게 느껴졌지. 
그 아저씨가 마포구 수유동 우리 동네에 살다가 내가 매일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 근처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걸 알고선 더 그랬어. 
그래선지 시의 마지막에서 아저씨가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하고 탄식
하는데 울컥하더라.  그때 다짐했지. 어른이 되면 중요한 일에만 힘 있는
사람에게만 분노하는 큰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시간이 흘러 난 어른이 되었어. 아저씨가 시를 쓸 때보다 더 늙어 버렸지.
가발 공장이 즐비하던 변두리 우리 마을에는 고층 아파트가 빼곡하고, 죽은
시인을 기억할 건 아무것도 없지. 
나도 좀 변했어. 지금의 나로 말하면, 조그만 일에 분개해.  작고 사소한 
일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라고 역설하지. 욕하는 청소부, 뽕 맞는 연예인, 
더러운 음식점, 술 취한 노숙자, 쓰레기 무단 투기, 불법 주차, 새치기...
분개할 거리가 너무 많아서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하고
탄식할 시간도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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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시(詩)의 문장들 몇 개를 보았습니다.
문학의 분야 중 시는 삶을 농축하고 집약하여 보여 주는데 오늘 시의 
문장들에서는 그 중 또 “엑기스”를 뽑아 보여줍니다.

시인들의 감각은 남다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평범한 것들에서도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바라보고, 세밀하게 관찰합니다.
그리고 맛깔스런, 쓸데없는 가지를 쳐내버린 언어들로 우리에게 다가
옵니다. 

저자는 요즘말로 “심쿵”하는 문장들을 자기의 추억과 감각으로 다시 풀어
나갑니다. 제가 처음에 숨은 실력자라고 했듯이,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능력이 대단합니다.

함민복시인의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라는 시는 이전에 한 번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학문의 분야 사이에서, 즉 과학, 철학, 음악, 미술, 
문학 등 그 경계에서 융합, 통섭이 일어나 새롭고 탁월한 무언가가 만들어
진다고 했던 내용에서 이 문장이 나왔었습니다.
저자는 경계가 “금”이 아니고 “사이”라고 다시 정의합니다.

두 번째 시에서 “모든 국은 어쩐지 슬프다”는 문장은, 저자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으로 거슬러갑니다. 혼자서 끙끙 아파서 누운 방에서, 어머니의 따뜻한
아욱국이 되살아납니다. 엄마곁을 빨리 떠나고 싶어서 반항했던 어린 시절이
철없어서 엄마가 그리워서 국은 한없이 슬픕니다.

세 번째 시의 “오늘은 너에게 나를 빌려 주고 싶구나”에서는 오래 전
친구들을 회상합니다. 가난해서 초등학교 졸업 후 공장에 간 친구,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은 교복입은 날 보기가 부끄러워 숨습니다. 
소녀가장으로 집안일, 동생돌보기에 버거운 친구는 야속한 선생님에게 출석부
로 머리를 쾅쾅 맞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오늘만이라도 나를 주고 싶다고 합니다.

네 번째 시의 “내 몸은 아버지보다 늙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검은 머리에 젊은 모습이었지요.
어느새 세월이 흘러 그 사진 속 아버지보다 시인은 더 나이가 듭니다.
그렇지만 그 아버지에겐 아직도 어린 아이일 나는, 그 시절 아버지가 몹시 
그립습니다.  요즘 아버지들은 예전의 아버지들보다 작습니다. 
작아지고 작아져 슬픈 세대입니다.

다섯 번째 시의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에서 저자는 어릴 때,
중요한 일에만, 힘 센 사람에게만 분노하는 큰 사람이 되고자 다짐하였지만,
어느덧 나이가 들어, 가발공장터에 빼곡이 들어선 고층아파트 동네에 사는
나는 사소하고 또 사소한 일에만 분개하고 있습니다.
분개할 꺼리가 너무 많아 “내가 얼마나 작은지” 생각할 틈조차 없으니.
참 신선하고 반전이 돋보이지요?

시를 통해 우리는 다르게 보고, 못 보던 부분을 보고, 잊혀졌던 추억들, 그
때의 감성을 되살립니다.

시의 문장들 몇 구절에 어느새 “감성 충전”이 완충되는 것을 느낍니다.
시는 감성 충전의 보조 배터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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