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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10. 2016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강 일 송

오늘은 현직 부장판사의 에세이 모음집을 한 번 보겠습니다.

그는 눈치와 겉치레를 중요시하는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를 비판하고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가 아니라 합리적인
개인주의를  꿈꾸고 있습니다. 

손석희 앵커는 그의 글 중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라는 말에 절대적인 공감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한 번 들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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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회식이고 행사다.  하지만 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매사에 일일이 투쟁할 열의까지는 없기에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양보와 타협을 해야 한다.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투사가 되기 싫으면 연기자라도 되어야
하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대나무숲에 가서 마음속 쌓인 외침을 토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이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려면 견뎌야 하는 것들이 지긋지긋하
게 싫다고 말이다.  눈치와 체면과 모양새와 뒷담화와 공격적 열등감과 멸사
봉공과 윗분 모시기와 위계질서와 관행과 관료주의와 패거리 정서와 조폭식
의리와 장유유서와 일사분란함과 지역주의와 상명하복과 강요된 겸손제스처와
모난 돌 정맞기와 다구리와 폭탄주와 용비어천가와 촌스러움과 기타 등등..

아무리 객관적인 척 논리를 펴도 결국 인간이란 자신의 선호, 자기가 살아온
방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게다가 현대 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인간의 성격
조차 타고난 요소, 즉 유전자의 영향이 상당하다고 말해준다.  그 바탕위에
인간관계, 일, 독서 등을 통해 쌓아온 직간접 경험들이 결국 “나”라는 고유한
개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들이 모여서 북적대는
술집이나 찻집 같은 곳이 내가 생각하는 이 사회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내 생각일 뿐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그저 저 별에서 저런 과정을 거쳐 자란
인간들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것을 서로 알게 될 뿐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차이에 대한 인식이 평화로운 공존과 타협의 
시작일지 모른다.  저 초록색 외계인들이 내 맘에는 안 들더라도 어차피
잠시 머물며 즐겁게 보내야 할 이 술집에서 서로 오해하고 총질하면
내 손해니 잠시 참아주기라도 하자는 합의가 있어야 술집이 돌아간다.

‘다름’은 물론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가능한 한 참아주는 것,
그것이 ‘톨레랑스’다.  차이에 대한 용인이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어찌 이웃을 ‘사랑’하기까지 하겠는가. 그저 큰 피해 없으면 참아주기라도
하자는 것이다. “제발 우리 서로 사이좋게 지내요. 어차피 한동안은
이 땅에 다 같이 발붙이고 살아야 하잖아요. 그러니 서로 노력을 해가자
구요.“  평생 청각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할 만큼 백인 경관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한 로드니 킹이 그로 인해 LA폭동 때 평화를 호소하며 한
말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평온한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깨져
버리는 유리같은 것인지 우리 하나하나는 얼마나 무력한지.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고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그리고
나와 아무 상관없어도 타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옆에서 나 혼자 행복한
일상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죄스럽고 마음 무거운 일인지.

사회에 나와 지금까지 겪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누구나 자기 몫의 아픔은 안고 살고 있더라는 것이다. 굳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나 자신의 몫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어떤 때는 다른 것은 몰라도 고통만큼은 평등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자도 권력자도 스타도 화려한 겉껍질 속에는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가득했다. 건강 때문에 가족 때문에 자식 때문에 때로는 자기
자신 때문에 남모를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물며 돈도
권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그 흔하디 흔해 보이는, 건강하게 자라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 아이를
갖고 키우며 사는 일들이 실은 얼마나 전쟁같이 힘든 일인지...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
라고 격려해주면서도, 끝에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하며
알아주는 마음. 우리 서로에게 이것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직업적으로 그다지 도움이 될 것은 없고 오해받을 소지는 많은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내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나는 대단한
철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체질이 소시민적이다. 
나는 문화예술을 좋아하는 사람, 독서모임, 법원 합창단 등, 소소한 소모임
이 즐거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인간관계는 내가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이다.

내가 글쓰기를 하고 있으면 “나중에 정치하려는 거지?”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꼭 있다.  왜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직업이나 성취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그 이름도 위대하신 “정치인”이라는 최종 포식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 개인적인 성향으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그것도 지금 노벨상 만년 후보 하루키가 아니라, 일본 
사회에 얽매이지 않고 로마에 일 년, 크레타섬에 일 년, 세계를 부평초처럼
자유롭게 떠돌며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소설과 소소하고 유치한 수필을
끝도 없이 써대던 예전의 하루키다.

세상에는 이 세상을 아군과 적군, 정의와 불의로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천사도 악마도 아닌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일방적인 기대심리를 투영하여 과잉 열광하거나
조금이라도 자기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면 배신자 취급을 하며 돌을
던질 사람들이다.  평생 하루하루를 분노, 절망, 투쟁, 당위만으로 채우는
것을 신성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불행하다.

나는 소박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일상 속의 작은 행복을 채워가는, 그러하
면서도 마음이 가는 일에는 주저 없이 자기 힘닿는 법위에서 참여하는
이들이 이끄는 곳으로 가고 싶다. 
인류 역사에는 언제나 비극이 가득했지만, 그 어떤 불행한 시대에서도
인간이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태어난 것도 내 의사가 아니었으니 사라진 후에 대단한 흔적을 남기고
싶지도 않다. 가장 두려운 것은 지나치게 빠른 평균수명 연장이다.
생물학적 수명과 사회학적 수명이 불일치하는 대책없는 고령화시대를
맞아서 말이다.

몇 년 간 대법원, 고등법원 등에서 큰 업무만 담당하다가, 오랜만에
서민형 분쟁을 다루는 민사재판 업무를 맡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업무 부담이 줄었는데도 이상하게 의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2년 넘게 끌고 있는 재판을 진행했다. 변호사 없이
나 홀로 소송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의 하소연은 길고 길었다.
어느 정도 지나자 재판에 필요한 부분도 아닌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솔직히 짜증도 나고 지치기도 했지만, 뒤에 순서를 기다리는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들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마친 아주머니가
갑자기 내게 절을 꾸벅 하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쳐다보니
그동안 이 사건과 관련하여 경찰, 검찰, 법원을 여러 번 들락거렸는데
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것은 내가 처음이라는 것이다.
가슴 속 한맺힌 얘기를 판사가 다 들어주니 이제 결과가 어떻게 되든 
여한이 없다며 고맙다고 하셨다. 

부끄러웠다. 난 그저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 그건
원래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 과분한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을 리
없다. 나는 거기다가 그 사건을 작고 단순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이리 절실하고 한 맺힌 일인데 말이다.
죽비로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나는 경험이었다.

책, 글쓰기, 여행, 인간관계, 모두 내게 중요한 행복의 원친이다. 하지만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는 것 역시 이에 못지않은 과분한 행운이다.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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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처음 부분에 손석희 앵커의 말이 나옵니다. 
“나는 문유석 판사 생각의 대부분과 그의 성향의 상당 부분이 나와 
겹친 다는 데에 경이로움까지 느끼면서 이 책을 읽었다.“

나도 그의 글을 읽으면서 상당부분 나의 생각과 겹친다는 생각을 했네요.
그는 그만큼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까요?

그의 말 중, 고통은 평등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평범한 삶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이 인생인지,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지,  등등, 그의 말은 내 가슴속 생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글쓰는 것을 즐기는 것은 저랑 취미가 비슷하네요.
그는 직업 상 이득이 없지만 글 쓰는 게 행복해서 쓴다고 합니다.
오히려 정치할 것이냐는 오해도 받곤 하면서.

우리나라는 문판사처럼 개인주의자라고 쉽게 고백하기 어려운 풍토이지요.
개인주의는 자칫하면 이기주의로 치부되기 쉽고, 전체의 이익을 저해하는
존재로 낙인찍히기 십상이구요.
하지만 그는 담담하게 이 책을 통해서 합리적 개인주의가 모든 법치주의
의 토대이며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다름에 대한 인정, 다양성에 대한
관대함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나홀로 소송중인 아주머니에 대한 이야기처럼, 나도 내 이야기처럼
부끄러움이 올라옵니다. 아파서 찾아 온 수많은 환자들 얘기를 성실히
성심껏 들어 주었는지.  바쁘다는 핑계로, 다음 환자가 기다린다는 변명으로
마음을 다하지 않은 건 아닌지.

역시 책은 만인의 스승입니다.  둔감한 나를 이리 일깨우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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