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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19. 2016

<김영하 산문, 읽다>

<김영하 산문, 읽다>  김영하


                               강 일 송


오늘은 소설가 김영하의 산문 연작 중 하나인 “읽기”에 대한 내용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영하(1968-)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가입니다.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화천에서 난 이후 전국을 다니며 성장하다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우연히

작가적인 소질을 하이텔 등 PC통신에서 우연히 발견한 후 작가가 됩니다.


1995년 계간 <리뷰>에 “거울에 대한 명상”으로 등단 한 후, 활발한 작품활동을

합니다.  소설 “빛의 제국”, “검은 꽃”, “너의 목소리가 들려” 등 많은 작품이

있으며,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만해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도 섭렵합니다.

현재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이탈리아, 네덜란드, 터키 등 외국에서 활발히

그의 작품들이 번역출간되고 있는데, 우리나라 작가 중 일찍이 해외 진출까지

염두에 둔 작품활동으로 유명합니다.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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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러분에게 제가 읽은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작가입니다.  작가니까 책을 씁니다. 지금까지 아마 스무 권 정도의

책을 출간했을 겁니다.   그런데 읽은 것은 몇 권일까요?


저는 다독가는 아니지만 아마 지금까지 최소 수천 권은 읽었을 겁니다.

이 비대칭성에 저는 늘 압도되곤 합니다.

수천 권을 읽고 고작 스무 권을 쓴 셈인데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렇습니다.

많이 읽고,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책을 써냅니다.


양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질에 있어서도 대체로 읽은 것보다 못한 것을

써서 세상에 남깁니다.  지금 제 서가에 있는 책들은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천 년을 살아남은 것들입니다.  그 책들은 시대와 언어를 초월해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고전이라 말하는 책들이지요.


보르헤스에 따르면 “고전은 클라시스 calssis, 즉 전함이나 함대에서 유래

한 말“ 이라고 합니다.  고전은 질서정연한 책입니다.

고전은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리의 과전을 거듭

하여 거치게 되었습니다.

고전이라는 이 질서정연한 함대의 선두에는 단연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가 자리잡고 있을 겁니다.


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의 서두에서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OOO를 다시 읽고 있어“ 라고 말한다 합니다.

또한 고전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라 합니다.


다른 정의로는 “고전이란,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책을 실제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을 발견하게 해주는 책이다.“ 라고 합니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에서 연대기순으로 풀어 놓지 않습니다.

이야기 속의 시간이 현재와 과거를 오갑니다.  2800년 전에 호메로스는

현대에 보기에도 복잡한 플롯을 꾸미는데, 그것은 이미 당대의 독자(청중)

들이 이미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굉장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후대의 천재적인 작가들, 특히 셰익스피어가 그랬듯이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를 다르게 쓰기‘ 위해 호메로스도 노력했을 겁니다.

여러 겹으로 텍스트를 감싸고,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인 오디

세우스의 모험 부분을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고전은 당시의 진부함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고전은 당대의

뭇 책들과 놀랍도록 달랐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진부함과는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


기원전 436년 무렵 위대한 극작가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왕”을

집필하여 비극 경연대회에 참가합니다.

마찬가지로 당대의 사람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이야기를 작가는

새롭게 구성할 필요을 느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연대기적 서술을

포기합니다. 거기다가 몇 시간 내에 끝을 내야 하는 연극의 대본이라

과감한 압축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래서 연극이 시작되면 우리는 이미 왕좌에 오른 오이디푸스를 만나게

됩니다.  이런 서사기법을 ‘결정적 순간의 바로 직전에서 시작한다.’ 고

말합니다.   전염병이 창궐한다는 신하의 보고를 받고 누가 신들의 분노

를 자아냈는지 찾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는 “내 일러두거니와, 그 살인자가 누구든, 내가 권력과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누구도 그자에게 도움을 주어서는 안 되고, 그는 사악한

인간인 만큼 불행한 일생을 비참하게 살다가 가라고 나는 저주하오.“


하지만 그 당시 관객들은 이미 오이디푸스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마음속으로 “네가 저주하는 그 살인자가 바로 너야!” 라고.

이 연극은 단 하루의 이야기입니다.  수사를 명하고, 증인들이 불려오고,

결국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범인이 자신임을 알게 되지요.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가 자살하고, 그가 제 눈을 찔러 스스로 장님

이 되기까지 모두 단 하루의 일입니다.


소포클레스는 마치 잘 만들어진 한 편의 현대영화처럼 치밀한 플롯으로

오이디푸스를 영광의 왕좌에서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습니다.

우리가 팝콘을 먹으며 보는 현대 영화나 소설은 아직도 “오이디푸스왕”

의 자장 안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왜냐하면, 이 희곡에 적용된 여러

기법은 아직도 현대영화에서 그대로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포클레스와 “오이디푸스왕”을 높이 평가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에서 비극의 시간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비극은 가능한 한 태양이 일 회전하는 동안에 사건의 결말을 지으려는

경향이 있다.“   즉 극이 절정으로 치달아 클라이막스에 가까워졌다면

그 결말은 다음날 동이 트기 전에 끝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비극은 대부분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 내재된 성격적 결함으로 파멸하는

얘기입니다.  반대로 희극은 우리보다 못한 이가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비극에서 우리를 가장 매혹하는 것은 급전(急轉)

과 발견“이라고 말합니다.


“오이디푸스왕”의 반전은 범인이 왕 자신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왕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잘났다고 생각해왔던, 죄는

오직 다른 사람이 지을 뿐 자신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믿었던 중대한

착각과 오만을 ‘발견’합니다.


관객보다 잘난 줄로만 알았던 대단한 인물들이 자신의 어리석음과 오만,

무지를 발견하고 대면하는 순간은 큰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젊은 영화감독들은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2400년 전에 그리스인들이

발견한 이 원칙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했습니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항상 너무 늦은 순간에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곤

하지만,  저는 독서를 통해 커다란 위험 없이 무지와 오만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독서는 왜 하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오만과의 투쟁일 겁니다.

저는 “오디세이아”와 “오이디푸스왕”을 읽으며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우리가 예전보다 매우 발전했다고 믿는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 됩니다.

어찌 보면 독서는 위험한 행위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사람이 독서를

하는 사람입니다.


비평가 헤럴드 블룸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하지만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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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김영하작가의 입을 통해 독서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역시 작가답게, 여느 독서에 관한 서적들과는 색다른 방향으로 색다르게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수천 년을 이어져 살아 내려온 고전은 이미 질서가 정연한 함대와도 같아서

처음 읽어도 다시 읽는 듯한, 그리고 저절로 다시 읽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가장 오래된 고전에서 가장 새로운 창의성을 문득문득

발견도 하구요.


그리고 비극과 희극에 대한 정의와 기법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현대영화나 연극의 여러 기법들이 이미 수천 년 전에 그리스의 비극 경연장

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함께.


마지막으로 그는 독서는 위험한 행위라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무지와 오만, 잘못된 믿음을 무너뜨리니 한편으로는 위험하고

한편으로는 자기를 살리는 행위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규정짓고 있는 자아의 상(像)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다시

하고, 오만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자아를 독서를 통해 바로 보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작가들은 많이 읽고 적게 쓰는, 비대칭성에 늘 압도된

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풋(Input)과 아웃풋(output)은 원래 비대칭이 되어야

, 그것도 엄청난 비대칭일 때 비로소 창의적인 사고와 글이 탄생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노력보다 좋아함이, 좋아함보다 즐길 수 있음이 무엇이든 오래 지속

할 수 있는 힘이라는 명언을 되새겨 보면서, 오늘 이 산뜻한 책 한권을

소개해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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