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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02. 2016

<카르페 디엠과 메멘토 모리>

김영하 산문Ⅲ<보다> 中


오늘은 소설가 김영하의 산문집 중 세 번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이전에 <읽다>, <말하다>를 말씀드렸고, 오늘은 <보다> 산문집 중 한 가지 내용을 보려고 합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의 한 구절로, 즐기다, 잡다, 사용하다의 “Carpe”와 “날”이라는 의미의 “Diem”으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즉, “현재를 즐겨라, 현재를 잡아라”라는 뜻이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들려주어 유명해졌습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로,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이 말을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합니다. "메멘토 모리!"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 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 키워드로 진행하는 그의 글을 한번 보겠습니다.





일본 미야기현 유리아게 마을의 주민은 오천육백여 명이었다. 2011년 3월 11일, 대지진이 발생하고 이어 쓰나미가 마을을 덮치자 이중에서 칠백여 명이 사망한다. 지진과 쓰나미 사이에는 칠십 분이 있었다. 지진 대비에는 세계 최고라는 일본에서 나고 자란 이 평화로운 어촌의 주민들은 왜 전원 대피하지 않았을까? 왜 가만히 자기 집에 남아 쓰나미가 닥치기를 기다린 것일까?


1950년 6월 25일의 경향신문 2면에는 ‘영화계의 빈곤상’이라는 제목의 컬럼이 실려있다. 영화제작의 열악한 현실을 질타하는 글이었는데, 그날 새벽 인민군은 38선을 넘어 대거 남침을 하고 있었다. 같은 날의 동아일보는 종로, 충무로 일대 귀금속상들이 불경기에 신음하고 있다는 기사를 전하고 있다.


전쟁을 다룬 많은 소설들은 대부분 전쟁 발발 직전의 평화로운 풍경으로부터 시작한다. 인물들은 전쟁 발발의 재앙을 암시하는 나쁜 징조들에 유념하지 않는다. 그들은 태연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곧 아무 의미도 없어질 문제로 마음을 졸인다.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은 어느 날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재산을 동결하고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했다. 연설 때마다 유대인을 싸잡아 비난하면서 그 강도를 높여갔다. 처음부터 가스실행은 아니었던 것이다. 유대인 학살 영화를 본 관객들은 다들 안타까워한다. 왜 진작 스위스나 미국으로 달아나지 않았을까? 1950년 6월 귀금속상들도 불경기를 탓할 게 아니라 진열대의 귀금속을 쓸어 담아 피난을 떠났어야 할 상황이었다. 유리아게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맨홀에서 물이 분수처럼 뿜어 오르는 현상을 무시하고 왜 부러진 TV스탠드의 다리나 고치고 있었을까?


지난 일을 보면서 ‘저런 어리석은 바보들’이라고 비웃는 건 쉽다. 하지만 이야기의 시간을 현재로 돌려보면 어떨까. 북한이 난데없이 서울 상공에 핵폭탄을 터뜨렸다고 가정해보는 것이다. 미래의 작가가 이를 소재로 소설을 썼다면 그 소설을 보는 독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곧 닥칠 운명을 모른 채 너무도 태연하게 쓰잘데 없는 일로 투닥거리며 살고 있었다고 안타까워할 것이다. 저출산, 부동산 가격 하락, 불경기, 왕따. 지금 우리에게 심각한 모든 문제가 그들 눈에는 하잘것없이 느껴질 것이다.


유리아게 주민들이 칠십 분이나 대피하지 않은 사실을 일본의 집단심리 연구자들은 몇 가지 편향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다수 동조 편향>이다. 거리에 나와보니 대피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집에 가만히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집에 있었다. 이게 다수 동조 편향이다. 대구 지하철 참사 때도 전동차안에 연기가 자욱해졌는데도 동요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정상화 편향>이다. 우리 뇌는 위험한 징조들을 어느 정도는 무시하도록 진화해왔다. 이 센서가 너무 민감하면 공황장애나 광장공포, 고소공포, 폐소공포 등에 시달리고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워진다.


2013년 4월, 북한의 무시무시한 협박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우리가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세계가 놀라워했다. 후쿠시마의 방사능이 무서워 일본여행을 못하겠다는 한국 대학생에게 일본인이 김정은의 핵은 안 무섭냐고 의아해 했다고 한다. 내가 아는 한 흑인 할머니는 뉴욕 할렘에 사는 데 멕시코 여행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범죄가 너무 많아서 위험하다는 것이다. 반면 멕시코의 부자들은 뉴욕 여행을 가도 할렘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그들은 할렘을 대낮에도 총격전이 벌어지는 마약갱단의 천국으로 생각한다. 나는 할렘과 멕시코를 여러 번 다녀왔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다수 동조 편향과 정상화 편향 덕분에 우리는 대한민국이나 할렘, 일본과 멕시코에서 태연히 살아갈 수 있다. 다른 곳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면서.


남의 위험은 더 커보인다. 반면 자기가 처한 위험은 무시한다. 그게 인간이다. 나는 북한이 핵미사일을 쏠지도 모르니 이에 대비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로마인들은 화려한 연회를 열 때마다 노예가 은쟁반에 해골바가지를 들고 손님들 사이를 지나다니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 같은 깊은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게 연회의 흥을 더 돋우었기 때문이다. 해골바가지를 보면 술맛이 더 났던 것이다. 지금도 그 전통은 핼러윈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죽음과 종말을 떠올리면 현재의 삶은 더 진하고 달콤해진다. 로마인들은 이천 년 전에 이미 그걸 알고 있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파국을 상상해보는 것은 지금의 삶을 더 각별하게 만든다. 그게 바로 카르페 디엠이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은 그렇게 결합돼 있다.




오늘은 김영하작가의 산문집 중 <보다>의 내용을 한번 보았습니다. 인간이 가진 <다수 공조 편향>의 영향으로 유리아게 주민들이 일찍 대피하지 않았고, 지하철 참사 때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세월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위의 많은 친구들을 보면서 큰 일이 있을거라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정상화 편향>으로 인해 북한이 핵으로 계속 위협을 해도 우리 국민들은 잘 먹고 잘 자며, 여행도 거리낌없이 잘 다닙니다.


만일 이 모든 것에 다 반응하고 산다면 아마 피곤해서 살지를 못하고 일상 생활을 영위하기가 힘들겠지요. 오랜 세월을 통해서 이러한 기전을 몸에 장착(?)을 한 것은 이런 것이 없을 경우보다 있을 때 생존의 확률이 증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선생이 말했던, “카르페 디엠”과 “메멘토 모리”는 서로 연관이 깊습니다. 평소에 죽음을 늘 기억하고 산다면, 현재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할 것이며 결코 함부로 낭비하지를 않겠지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의기양양한 개선 장군 뒤에서 “메멘토 모리” 라고 외치게 한 로마인들은 참으로 현명하였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이 말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한창 잘 나가는 사람들 귀에는 이 말이 들어올 리가 없겠지요?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정도가 비슷한 의미의 말로 보입니다. 지금 가진 권력이나 부는 잠시 머리위로 지나가는 구름과 같다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누구든지 어떤 일을 대하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항상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임하여야 한다는 진리를 늘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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