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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19. 2016

<말하다> 김영하 산문 2.

<말하다> 김영하 산문 2.


                강 일 송


오늘은 소설가 김영하의 산문집 중 두 번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저자가 힐링캠프, TED, 세바시, 대학강연 등에서 하였던 내용으로 산문집

을 엮은 책입니다.


그는 남다른 감각이 있습니다. 일찌감치 해외로 눈을 돌려 미국, 프랑스,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등 10여개 국에서 번역되어 출간이 활발히 되고

있는 몇 안되는 작가입니다.


60년대 태어나 80년대 대학을 다닌 그는 희망없이 사는 젊은이들에게

매년 10%이상 고도성장하던 80-90년대와 저성장이 고착되고 있는 현재

와는 다르다고, 현실이 어렵다고 솔직히 이야기합니다.


막연히 희망을 이야기하고 노력할 것을 권유하고, 꿈을 가질 것을 종용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비관적 현실주의, 냉정한 현실 판단 후 무너지지

않고 낙심하지 않는 견고한 내면을 가지자고 응원하고 위로합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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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회사 사장님이 신입사원들을 놓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왜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느냐, 노력을 할 생각을

안해요.“


하지만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현실에 안주”한다는 자체가 꿈같은

일입니다.  안주가 사치이고 점점 더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군부대에 강연하려 간 적이 있습니다.  병사들이 정말 좋아하더

군요. 푹 잘 수 있으니까요.  역시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병사

들은 정말 잘들 자는거에요.  마지막 질문시간에 한 병장이 집안도

변변찮고 스펙도 시원찮은데,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겠

냐고 묻더라구요. 저는 그 병사에게


“음, 잘 안될 거에요”


그러자 잠들어 있던 병사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드는 겁니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눈을 떠야 한다. 이런 직감들이 들었나봐요.

저는 말했습니다. 이제는 보란 듯이 성공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미안하지만 여러분 앞에는 암울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나는 작가라 성공하는 법 같은 것은 가르쳐 줄 수 없다.


작가는 실패 전문가다. 소설이라는 것이 원래 실패에 대한 것이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기껏 고생해서 커다란 물고기를 잡는 데 성공

하지만 결국 상어들에게 다 뜯기고 뼈만 끌고 돌아온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옛사랑을 얻기는커녕 엉뚱한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젊은 생을 마감한다.


문학은 성공하는 방법은 가르쳐 줄 수 없지만 실패가 그렇게 끔찍하지

만은 않다는 것, 때로 위엄 있고 심지어 존엄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

쳐 준다. 그러니 인생의 보험이라 생각하고 소설을 읽어라.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낙관이 아니라 “비관”

입니다. 어떤 비관인가? 바로 <비관적 현실주의>입니다.

비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되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뿐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바꾸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게 쉽다면 그런 책들이 그렇게 많이 팔릴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낙관주의자나 비관주의자가 아니라

비관적 현실주의자라 합니다.

낙관주의자는 한 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비관적 현실주의자는 마실 물도 부족하지만 면도를 하고 세수를 합니다.


비관적 현실주의는 현실을 직시하되 그 안에서 최대한의 의미,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데에는 “개인주의”가 필수

입니다.  집단은 어디론가 쏠리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타인의 영향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산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뛰어간다면 이유가 있으리라 믿고 일단 같이

뛰어 가는 것이 편합니다.


하지만 911테러 때 많은 사람들이 대피할 시간이 충분했음에도 소방관

이 오기를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고 사무실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도 연기가 전동차 안에 자욱할 때까지 대부분

동요하지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기관사가 방송으로 곧 출발할거라

했고 다른 사람들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관적 현실주의를 견지하려면 남과 다르게 사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의 개인으로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일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기업에는 심리학 박사가 즐비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행동을

예측하고 더 나아가 조작하고 싶어합니다.  구글 같은 기업은 빅데이터

를 제공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행동은 넓은 의미에서 대체로 예측 가능하다”고 단언

합니다.


저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관적 현실주의에 두되, 삶의 윤리는 개인

주의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동조될 때,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건강한 개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

하고 싶습니다.  이 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물건을 사서 얻는 즐거움이 아니라, 뭔가를 “행함”으로써 얻어

지는 즐거움입니다.  즉, 구매가 아니라 경험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의 대부분은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유산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오래 살아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예술>과 관련되었다는 겁니다.   글을 쓰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연극에 참여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 여기엔 대부분 큰돈이 들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즐거움은 얼핏 듣기에는 쉬어 보이지만 막상 시작해보면 간단하지

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즐거움을 천대시하는

사회에서 성장했으니까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살 수 있나?“ 어른들한테 많이 들어오던 소리입니다.

우리는 명분이나 도리 같은 “타인 지향적 윤리”를 강조하는 문화에서

자라났습니다.  자기 즐거움을 희생하고 타인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세상에 대해서 비관적 현실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윤리적으로 건강한 개인

주의를 확고하게 담보하려면 단단한 내면이 필수적입니다.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인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다양해 질 것입입니다.


요즘같은 저성장 시대에는 모두가 힘을 합쳐 한 길로 나아가는 것보다

다양한 취향을 가진 개인들이 나름대로 최대한의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

하면서 타인을 존중하는 것, 그런 개인들이 작은 네트워크를 많이 건설

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학은 태생적으로 개인주의적이며 우리에게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도 모두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세계입니다.


돈을 벌거나 명예를 쌓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리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감각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깊게 느끼는 삶, 남과

다른 방식으로 자기만의 내면을 구축하는 삶, 이런 삶의 방식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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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을 지난번에 “읽다”에서 오늘은 “말하다”

편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작가는 60년대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저와 시대적으로 같은 시기

를 경험하였고, 사고의 결이 비슷함을 많이 느꼈답니다.

지난번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과도 상당히 유사한 사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문판사도 비슷한 연배이네요.


보통은 어려운 시대를 헤쳐가는 방법이 희망과 낙관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비관적 현실주의를 가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윤리적 개인주의로 타인을 존중하면서 최대한 즐거움을 많이 찾으

라고 합니다.


지난번 문유석판사도 그렇고 김영하작가도 합리적인 개인주의를 강조합니다.

집단주의는 어디론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휩쓸리기가 쉬워서라고

합니다.   사람이 집단이 되어 버리면 개인의 의지는 사라지고 그냥

집단의 이익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내용은 2년 전 올렸던 라인홀드 니버(1891-1971)의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사회”라는 책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개인은 이성에 의해

자기 극복 능력, 타인의 욕구를 배려하는 능력이 있지만 사회를 이루어

버리면 이런 능력이 결여되면서 심한 집단 이기주의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인구절벽, 저성장 고착, 인공지능, 로봇, 드론의 등장 등으로 갈수록 고용이

힘들어져,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등으로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낙관을 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근거가 부족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다양성을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면서,

자신의 올바른 방식으로 예술적 즐거움을 충분히 즐길 줄 아는

건강하고 합리적인 개인주의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훌륭한 방편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영원한 불경기와 불황은 없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처럼 힘을 내어

면도를 하고 세수를 하면서 미래에 대해 버티는 힘을 키워나가면

어떨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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