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떤 거리는 걷고 싶은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현준
-- 왜 어떤 거리는 걷고 싶은가?
강 일 송
오늘은 도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자는 도시라는 유기체를
인문학적 시선으로 보면서 다양한 관점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현재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이자 (주)유현준건축사사무소 대표
이다. 연세대학교, 하버드, MIT 등에서 건축공부를 하였고 김수근건축상,
2013 대한민국공간문화대상 대통령상 수상 등,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중 한 명입니다.
오늘은 그 중 강남거리는 왜 걷기 싫은지, 명동에는 왜 걷는 사람이 많은
지 등의 내용을 위주로 한 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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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해외의 유명 도시로 여행을 가면 그 곳을 대표하는 유명한 건축물
앞에 가서 사진을 찍는다. 파리에 가면 에펠탑에서, 로마에 가면 콜로세움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어야 숙제를 한 듯 마음이 편해진다.
그것은 건축물이 그 나라와 장소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건축물이 왜 정체성을 만드는 것일까? 그건 건축물만큼 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들어간 결정체는 없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짓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간 일은 없었
다.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인부들을 위한 도시를 곁에 건설하고, 당대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건축물은 그 지역의 지리적, 기후적인 특색 뿐 아니라, 문화적 DNA를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괴테는 “건축은 얼려진 음악”이라는 말을 하였다. 그의 말대로 건축에는
음악처럼 리듬, 멜로디, 화음, 가사가 있다.
고딕 성당안의 도열해 있는 기둥들이 음악의 박자처럼 느껴지고, 스테인드글
라스의 이야기는 가사처럼 우리에게 말을 한다.
하지만 건축물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전달 매체가 있다. 그것은 비어있는
“공간”이다. 공간은 빅뱅으로부터 시작하여, 시간과 함께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공간이 없다면 빛도 없고, 공간이 없다면 우리는 시간을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건축은 이러한 공간을 조절해서 사람과 이야기한다.
건축물을 만든 사람은 돌, 나무, 흙 같은 자연의 재료를 가지고, 시간의 한계
를 넘어서 그 공간을 가지고 후대의 사람과 이야기한다.
건축물이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하고, 건축물은 비로소 삶의 일부가 된다.
◉ 강남의 거리는 왜 걷기 싫을까?
걷고 싶은 거리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먼저 걷고 싶은 거리와 성공적인 거리(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는 다르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강남의 테헤란로는 성공적인 거리이기는 하지만 걷고 싶은 거리는 아니라고
평가된다. 반면, 명동 같은 거리는 성공적인 거리이기도 하면서 걷고 싶은 거리
이기도 하다.
걷고 싶은 거리는는 대부분 성공적인 거리지만, 성공적인 거리라고 해서 반드시
걷고 싶은 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걷고 싶은 거리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체험이 동반되어야 한다.
성공적이지만 걷고 싶지 않은 거리는 체험이 다양하게 제공되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강북을 대표하는 세종로의 경우 압도적인 스케일로 상징성을
가지지만 주변에 가게도 없고 바라볼 것이 없으니 남들에게 노출되고 싶은
사람들이 그 공간을 점유한다. 즉 정치적 시위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행 속도는 시속 4킬로미터로 이루어진다. 이 보행속도는 시속
60킬로미터로 달리는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느끼는 경험과는 사뭇 다른
체험이다.
유럽의 바르셀로나 구도심과 시카고 도심의 블록의 코너수를 비교해 봤더니
4평방킬로미터에 바르셀로나는 2,025개, 시카고는 1,075개 였다.
유럽의 도시들은 오래전에 생겨나, 마차가 지나가는 속도에 맞게 도시가
구획되었고, 미국의 경우는 자동차를 위해서 만들어진 도시들이다.
유럽의 도시는 더 자주 교차로와 마주하게 되고 더 다양한 선택의 경험을
한다. 이러한 선택의 경우의 수가 많을수록 그 도시는 “우연성”과 “이벤트”
로 넘쳐나게 되는 것이다.
명동의 거리에는 상점이 많아서 그 입구를 지나게 될 때마다 가게에 들어
가거나 계속해서 길을 걷거나 하는 선택을 해야한다. 이런 거리는 보행자가
다양한 체험과 이벤트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위거리당 상점의 출입구 숫자가 많다는 것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 째, 높은 이벤트의 거리는 보행자에게 “권력”을 이양한다.
즉 공간의 주도권을 보행자가 가진다는 것이다.
둘째, 높은 이벤트 밀도의 거리는 보행자에게 변화의 체험을 제공한다.
조금만 걸어도 새로운 점포의 쇼윈도를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몇 초당 케이블 TV의 채널을 바꾸는 것과 같은 효과를 뜻한다.
셋째, 높은 이벤트 밀도의 거리는 매번 같은 거리를 가더라도 방문할 때
마다 새로운 체험의 가능성을 높여준다. 세종로의 미국대사관은 정문이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홍대앞 피카소거리는 매번 다른 기억을 가질 수
있다.
경험의 밀도를 필자가 계산해보니 “명동거리=가로수길>홍대앞>강남대로
>테헤란로“ 순이었다. 수치상으로는 명동거리와 가로수길은 테헤란로에
비해 4.5배 높은 경험밀도를 가지고 있었다.
즉 명동과 가로수길이 2.5초당 채널이 바뀐다면 테헤란로는 11초당
채널이 바뀌는 TV에 비유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카페 앞 데크는 실질적인 공간의 속도를 낮추어 준다.
만일 세종로를 걷고 싶은 거리로 만들려면, 건축물 앞에 일렬로 가게를
설치하고 노천카페를 만들어 전체적인 공간의 속도를 낮추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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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도시와 건축을 통한 인문학적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건축물은 그 지역 문화의 DNA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괴테의
말은 멋지군요. “건축은 얼려진 음악이다”
사실 건축 뿐 아니라, 미술에서도 음악이 내재되어 있지요.
문학, 특히 시에서는 운율, 리듬이 살아 넘칩니다.
예술은 서로를 두루두루 안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오늘 걷고 싶은 거리와 그렇지 않은 거리의 차이를 잘 보았습니다.
다양한 체험과 이벤트가 풍부한 거리가 걷고 싶은 거리이군요.
보행자에게 권력을 이양한 거리, 보행자에게 변화의 체험을 제공하는
거리, 보행자에게 새로움을 지속적으로 주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저자의 세종로에 대한 분석은 무릎을 치게 합니다. 압도적인 스케일
만 있고 다양한 체험이 없으니, 노출된 공간에는 시위대만 들어선다고,
그것을 해결할 방법이 가게와 노천카페의 데크를 두어 공간의 속도를
낮추어야 한다고.
도시는 사람이 사는 장소이므로 필연적으로 사람의 흔적이 남을
것이고 그 사람들의 삶이 녹아들 것입니다
도시가 공간의 언어로 말해준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게 되었네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가 다양한 이벤트의 밀도를 높여 우연성이
넘치고 활기찬 거리,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이양하는 거리가
되어 거리를 걸을 때마다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