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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by 해헌 서재

<장정일의 공부>


강 일 송


오늘은 장정일(1962~)의 책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의 소개를 찾아보면, 불우한 환경 속에 최종 학력이 중학교 중퇴임에도 불구하고

독학과 독서를 통해 문학의 길에 입문하였고, 1984년 “언어의 세계”에 처음 시를

발표한 이래 1987년 희곡 <실내극>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합니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필화사건을 겪기도 했는데, 어찌 하였든 오늘은 “공부”

에 대한 그의 말을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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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란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위한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투쟁.


@ 중용이 미덕인 사회의 요구와 압력을 나 역시 오랫동안 내면화해 왔다.

그런데 어느 날 알게 되었다. 내가 “중용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우리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했기 때문도 맞지만, 실제로는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렇다. 어떤 사안에서든 그저 중립이나 중용만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뿐더러,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

였다.


@ 우리 사회에는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지긋지긋한 “양비론의 천사”들이 너무

많다.


@ 나의 무지의 근거를 들여다보니, 상급학교를 진학하지 않았다는 결점도 있지만,

한때 내가 시인이었다는 사실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나는 청춘을 그렇게 보냈다.


@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마흔 넘어 새삼 공부를 하게 된 이유는 우선 내 무지를

밝히기 위해서다. 극단으로 가기 위해, 확실하게 편들기 위해,

진짜 중용을 찾기 위해!


@ 공부 가운데 최상의 공부는 무지를 참을 수 없는 자발적인 욕구와 앎의 필요를

느껴서 하는 공부다.

이 책을 읽고 “여기서부터는 내가 더 해 봐야지” 하고 발심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걸 느끼게 하지 못했다면, 전적으로 내가 부족한 탓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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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력을 보면 만만치 않은 삶을 살아왔음을 짐작케 합니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중학교조차 마치지 못하였으며, 그 와중에 글은 언제 배워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고

최연소 “김수영문학상”까지 받다니요.


공부란 진짜 중용, 진짜 휘둘리지 않는 삶을 위한 것이란 그의 말에 많이 공감합니다.

이 정도에서 그의 공부에 관한 본문 중 인상 깊었던 파트를 한번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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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화된 기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들


. 나치는 유태인을 미워했다. 그리고 똑같이 집시와 재즈를 미워했다.

집시를 미워한 까닭은 그들이 “대단히 불균형하고, 불투명하고, 예측 불가능하고,

신뢰할 수 없고, 게으르거나 이동적이고, 자극에 약한데다가, 간단히 말해 그들은

“노동을 기피하는 반사회적인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재즈는 왜 탄압받았을까? 나치의 문화정책자들이 보기에 재즈는 “리듬에의

완만한 몰입, 정해진 댄스 스텝이 아닌 즉흥적인 몸동작, 질서 정연한 멜로디가

아닌 불협화음이 느슨하고 해이한 삶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 나치는 규범화, 계량화, 획일화되지 않은 모든 “예측 불가능”한 것들과 돌발적인

“불협화음”을 제거하고 일사불란한 규범을 꾀했다.


. 포이케르트는 나치의 대두를 독일 사회의 전근대적인 후진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근대 문명의 구조와 문제 상황”에서 발생적 근거를 찾는다.

즉, 나치 이전의 17세기후반, 18세기 전반에 이미 서구사회는 거지, 부랑아,

게으름뱅이, 방탕아 등등 비사회적 일탈자들을 추방시켜 왔다.


. 나치의 멸절 정책은 사회를 규범화하고 정상화하겠다는 근대성의 병리가 만들어

낸 결과이다. 기괴한 19세기적인 인종주의 뿐 아니라 심리학, 의학, 범죄학,

사회복지학 등에서 학문적인 입지를 구축한 학파에 근거하고 있었다.


. 계몽주의의 도구적 이성이 아우슈비츠라는 예고된 파국을 불러왔다는 아도노르와

호르크하이머의 진단이 있다.


. 독일에서 나치가 패망하고도 규율 권력과 대감호로 이루어지는 “근대성 사회”는

여전히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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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나치시대의 일상사, 포이케르트>라는 책을 인용해서 나치를 비롯한

근대 문명의 획일적 병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네요.

단순히 인종주의 뿐 아니라, 심리학,의학,범죄학,사회복지학 등 다양한 학문이

관여를 하였고 현대에서도 여전히 지속이 되고 있다는 말에 공감이 됩니다.


우리나라도 5공시대의 서슬 퍼렇던 청송감호소가 떠오르는 군요.

역시 인간의 사고나 흐름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비슷하게 흐르나봅니다.

다름을 참지 못하는 문화나 사회는 언제든지 위와 같은 역사를 되풀이 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너무나 도덕적인 계몽주의의 도구적 이성이 아우슈비츠를 불러왔다는 아이러니를

생각해 보게 되는 하루입니다.


오늘 하루도 힘찬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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