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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Oct 13. 2016

<열림과 닫힘> 1. 정진홍

<열림과 닫힘> 1. 정진홍

                          강 일 송

오늘은 종교에 관한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이 책은 2009년도에 책을 읽고 한 모임
에서 주제발표를 했던 내용인데, 상당히 어렵고 생소한 용어들에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평생을 종교학에 바친 한 노학자의 노고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책이었습니다.
한번 그때의 글을 옮겨와 보겠습니다.


글이 길어서 3편으로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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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지은 저자 정진홍(鄭鎭弘)교수는 1937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개개 종교가 아니라 "인류의 종교문화“에 대한 천착을 하고 싶어
종교학을 공부하게 되었으며, 이는 자기의 문제에 정직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덕성여대, 명지대를 거쳐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서 2003년 정년퇴직했으며. 퇴임이후 현재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한국종교학회 회장,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으로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종교학 서설] [종교문화의 이해] [한국종교문화의 전개] [종교문화의 인식과 해석] [종교문화의 논리] [경험과 기억] 등이 있습니다.

이 책은 종교를 기존의 개개 종교들을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접근이 아닌 "인간의 경험에서 비롯하여 출현하는 하나의 현상으로 종교들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접근"을 취하면서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하여 종교문화에 다가가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 본다면,

<경 험>

종교는 낯설지 않습니다. 아득한 옛날부터 어디서나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종교라고 일컫는 "현상"이 없었던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종교는 사찰,성당,교회 등 "건물"일 수도 있고, 개개 종교의 전승이나 세계를 엮은 "역사"일 수도 있고, 신도나 성직자로 이루어진
"사람"일수도 있고, 구성원리가 제각기 다른 특정한 "종교인들의 공동체"나 그들이 수행하는 예배,예불,미사 등의 "의례"일수도 있으며, 진리라고 일컬어지기도 하고 신의 말씀이라고 고백되기도 하는 "경전의 가르침" 또는 "사상"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이 종교라고 묘사되는 일정한 범주 안에서 서로 이어져 있기에 "종교문화"라고 일컫는 편이 더 적절하겠습니다.
종교문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상은 종교인 또는 특정한 종교에 자신을 봉헌하고 있는 신도들입니다. 왜냐면 건물도, 역사도, 공동체도, 의례나 가르침도 결국 종교인들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종교인은 종교문화를 있게 한 가장 근원적인 존재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화현상이 있게 된 그 근원을 보면 인간의 삶에서 어떤 환경 즉 심각한 질병이나 좌절의 계기 등 어떤 특정한 경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도 또한 사람들이 겪는 어떤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삶은 곧 "경험이 점철되는 것", "특정한 사실들을 엮어 사는 것", "부닥침을 여과하는 장치"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험이 삶이고 삶이 경험인 것입니다.
종교경험이란 언제나 "신뢰성의 문제"를 야기합니다. 비종교인들은 종교인의 경험에 대한 진술을 승인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느낍니다. 종교경험의 표출이 절대성을 전제하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종교밖의 사람들에겐 상당한 저항을 유발하지만 그러한 절대성은 종교를 종교이게 하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종교에 대해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선 지녀야 할 태도가 종교라는 현상이 존재하게 된 것은 경험주체의 경험이 있어 가능한 것이고 이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존으로 승인해야 하며 종교인들의 자기주장을 존중하는 일입니다.
종교인이 없다면 종교가 있을 까닭이 없고, 그 종교인이 있음은 어떤 사람이 종교인이 될 수밖에 없는 어떤 경험을 했음을 뜻하는 것이고, 종교문화의 현존은 그렇게 있는 현상입니다. 한편 종교인들의 자기주장도 구조적으로 보면 비종교인들이 가지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의 경험을 얘기하면서 그것은 일반 경험의 범주에 감히 들 수 없는 "다른" 경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경험의 지극함을 전달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소통의 단절"을 스스로 초래하면서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차단하는 불가능한 작업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의 경험 속에서 드러난 삶의 모습"입니다. 경험이 없으면 표상이 없습니다. 표상을 읽는 일은 경험을 읽는 일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소업(所業)입니다.
그러므로 경험에 대한 관심은 종교담론의 처음이고 끝입니다.


<물음과 해답>

인간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잘살기"를 바란다고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 속에서 두 가지 문제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 판단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행복을 향해 노력을 한다고 하여도 성취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 근원자리로 돌아가 보면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만큼 실은 "불행한 현실"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승인하는데 이르게 됩니다.
이는 매우 심각한 일인데, 이는 결국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삶은 문제 있음"이라고 묘사해도 가능하고 또한 인간은 "문제를 지닌 존재"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인간 삶의 일상은 문제로 흠뻑 젖어 있습니다.
인간은 문제안에 있는 존재일 뿐 아니라 "물음을 묻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하는 더 적극적인 서술마저 가능하게 합니다. "언제 인간은 자신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가" 하는 물음으로 이를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물음이란 "모름이 수반하는 적극적인 삶"이라는 사실이고, 어떤 사물이 설명할 수 없고, 구조를 투명하게 모를 때, 기능을 예상할 수 없을 때 등 내가 지닌 "인식의 한계"를 스스로 터득할 때 물음을 묻게 됩니다.
지적탐구는 모름에 대한 승인과 앎에 대한 신념이 낳은 삶의 모습이고 끊임없이 모름을 제거하고 앎을 축적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앎이란 그 물음이 낳은 해답이고, "인식의 한계"를 느끼면서 불가피하게 물었던 그 물음에 대한 뚫림이고 열림인 것입니다.
앎은 그 어떤 것이든 또 다른 모름과 이어집니다.
물음이 해답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물음이 아닙니다. 해답의 추구가능성이 확인되지 않으면 물음은 물음 이전에 포기되는 것입니다. 물음의 물음다움은 아예 물음이 이미 해답을 배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종교를 "물음을 물을 수밖에 없는 경험이 드러난 현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시 그 "물음 안에서 해답을 얻고 그것을 확인하여 실재화하는 삶"이 곧 종교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물음을 물으면서 시작하는 것이지만 해답을 살면서 그 물음을 완성하는 문화입니다.
즉 이러한 "물음과 해답의 구조"가 우리가 겪는 일상 안에 있는 종교문화의 모습입니다.

<믿 음>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삽니다. 생각이 드러나는 모습을 보면 "일정한 틀"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를 "마음의 결"이라고 표현하기로 하고 여러 갈래의 마음결을 살펴보면,
이성(理性), 감성(感性), 상상(想像), 의지(意志)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느 것에도 뚜렷하게 넣을 수 없는 또 다른 독특한 마음결이 있습니다. 신념, 믿음, 또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이성 안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는 다른 결입니다. 믿음은 감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공감은 믿음의 바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은 의지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의연한 의지는 신념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할 만큼 의지는 믿음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상상은 믿음과 매우 유사합니다. 없는 것의 실재성을 주장할 때면 특히 그러합니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은 마음결의 하나이기보다 오히려 마음결 전체를 흔들 수있는 마음자리, 또는 마음결의 근원이며 삶의 종국과 관련된 마지막 물음에 대한 마지막 해답과 연계된 마음결이 곧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 조건과의 관계가 매우
"역설적"입니다. 어떤 경우 그 대상을 충분히 알 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믿음을 "~이다"라고 하는 긍정적인 평서문이라고 할 때 믿음은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에도 불구하고" 승인하는 삶의 태도를 함축합니다.
믿음은 마지막(궁극성)에 대한 태도일 뿐만 아니라 시작(근원)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삶을 총체적인 긍정을 통해 수용하도록 하고, 믿음은 그것 자체로 이미 해답입니다. 믿음 안에는 어떤 문제이든 이미 "해답된 물음"입니다.
"~에도 불구하고"라는 전제하에는 믿음이 현실을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바뀐 것은 삶의 주체인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이 삶을 직면하는 태도에 변화가 일었던 것이고, 그 변화는 종국적으로 문제를 더 이상 문제이게 하지 않도록 합니다.
종교는 이러한 태도를 지닌 문화입니다.


<문 화>

문화를 정의하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삶을 총체적으로 묘사하고 싶을 때, 우리는 이를 "문화"라는 언어 안에 넣어 기술하거나 진술을 합니다.
하지만 때로 개념은 그것이 실재로부터 출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개념으로 정리되어 사물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언어가 되면, 그 언어가 자기를 낳은 그 실재나 실재를 겪은 경험들을 스스로 한정하고, 설명하고 판단하곤 합니다.
문화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는 삶의 모든 모습을 담을 뿐만 아니라 삶의 어떤 모습도 수식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 문화라는 개념을 가지고 삶을 재단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현대종교문화를 서술함에 있어서 대체로 종교라고 일컫는 현상을 문화의 일반에서 배제하는 풍토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교를 다른 범주에 넣든지, 종교를 문화의 핵심이라고 하는 주장들이 있지만 이는 "종교적인 주장"일 수는 있어도 결국 인간의 삶의 한 모습으로 포괄하여 이해한다면 종교는 "문화 안에서 비롯하고 문화 안으로 귀결되는" 문화현상이라고 봐야 합니다.
문화 개념안에서는 하나의 종교, 유일한 종교란 불가능한 주장입니다. 여러 종교들은 언제나 서로 뒤섞일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현존해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순수한 불교도, 순수한 유교도, 순수한 그리스도교도 없습니다. 원시 종교라는 것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소멸한 종교가 아주 사라진 것도 아니며, 현존하는 종교가 반드시 영원하리라는 보장도 없으며, 지금 여기에서 지배적인 종교라고 평가되는 종교가 내일도 그러하리라고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종교가 낳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증오"나 "경멸이라는 이름의 자비"는 종교가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의 문화적 현상입니다.
종교는 문화현상일 때 비로소 그 현존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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