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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Oct 13. 2016

<열림과 닫힘>2. 정진홍

<역 사>

우리는 시간안의 존재입니다. 인간은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 시간에 예속된 존재, 곧
시간 안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변화하면서 불변하는 것"이 시간의 속성이고 또 그것이 역사입니다.
종교 또한 필연적으로 변화의 흐름에 실려 흘러 왔으며, 문자가 발명되지 않은 시대의 종교에서는 이야기를 하는 살아있는 이야기주체를 중심으로 종교의 주장이나 가르침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문자를 통해 글이 된 뒤에는 이야기 주체와 만나기보다 글과 만나면서 글에 담긴 화자(話者)의 뜻을 헤아리는 일이 더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언어에 담긴 생동하는 감동보다 글에 담긴 조용하고 진지한 지적 성찰의 내용이 더 중요한 것이 되었고, 이것은 대단한 변화입니다. 변화는 역사적 현상입니다. 그리고 종교는 변화합니다. 즉 종교는 역사적 현상이라는 것을 승인하는 것은 마땅히 지녀야 할 마음가짐입니다. 따라서 종교가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은 종교의 참 모습을 읽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입니다.
아주 긴 역사적 과정을 전제하고 말한다면 인류의 종교사는 "종교가 없었던, 그러나 모든 것이 종교적이었던" 그러한 때를 지나 마침내 종교라고 명명할 수 있는 "다른 현상"이 삶 속에서 드러난 "종교의 시대"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몸>

쉽게 살려면 단순히 생각을 해야 하는데, "쉽게 살려는 태도"는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해야 옳을 듯 합니다. 단순함은 명쾌하고 투명한 속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실재를 상당히 간과하는 과오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익숙한 "이원론적(二元論的) 사고"가 그러합니다.
이원론은 실재하는 모든 사물들을 아무리 복잡하고 다양해도 둘로 크게 나누어 각기 다른 범주로 정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주장입니다. 우리는 서로 대칭되는 여러 모습의 "둘의 현존"을 늘 겪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낮과 밤, 하늘과 땅, 삶과 죽음, 남자와 여자, 좋은 것과 나쁜 것 등을 경험합니다. 이원론은 주관과 객관, 이성과 감성, 사유와 행위, 정신과 물질 등의 개념을 병치시켜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원론은 "불가피하게 병존"하는 양자의 상충과 갈등을 구조적으로 지니고 실재전체를 수용하기보다 "선택된 실재"로 "선택되지 못한 실재"를 지워버리려는 의도도 확연하게 드러냅니다.
특히 삶을 몸과 정신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파악하며, 그러한 분류에 의해 실제적인 삶을 위한 규범을 도출하려는 태도가 전형적으로 그러합니다. 사유주체를 정신으로 사유객체를 육신으로 여기고, 자연스럽게 몸을 정신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인간이 지어낸 도덕규범도 한결같이 몸을 유념한 정신의 우위를 확보하려는 노력의 결실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덕은 몸을 다스리려는 지혜를 쌓아 놓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적 전통들이 다소간 차이는 있지만 하나같이 "금욕적인 몸의 견제"나 "해답에의 길로서의 금욕"을 위한 몸의 학대를 정당화한 흔적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몸이 없으면 정신도 없고, 몸이 없으면 그 몸으로 현실화 되는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몸없는 삶의 현실을 말한다는 것은 공허한 짓입니다.
종교는 몸과 단절될 수 없습니다. 종교문화를 제대로 만나려면 그 문화가 담고 있는 "몸이 움직이는 결"을 아울러 살펴야 합니다. "수행"과 "의례"가 그것입니다.
몸은 또한 취약성을 가지는데, 몸의 유한함, 한시적, 한계안에서의 존재가 그것입니다.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몸으로부터의 문제를 가지고 있고, 여전히 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기에 종교는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몸 짓>

몸은 "살아 움직이는 실재"이고 몸의 근원적인 속성인 "움직임"을 통하여 스스로 완결적인 자리에 섭니다. 삶이 몸짓이고 몸짓 그것 자체로 삶입니다.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몸짓하지 않습니다.
종교문화에서 종교 나름의 독특한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는데, "의례"입니다. 의례란 정형화되어 있고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수시로 등장하는 일련의 몸짓으로 종교문화의 상당한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경전 중심적이지 않더라도, 단순히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눈을 감는 몸짓만으로도 자신의 모든 문제를 다 펼쳐놓고 그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경험을 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체로 몸짓만으로도 충분한 해답의 의미체계를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배나 제의나 미사나 예불이나 굿 등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 일련의 행위에서 일정한 체계를 묘사할 수도 있고, 그것에 대한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종교의례란 전통적인 이원적 사유를 동원한다면 "의식의 물화(物化)현상"이면서 동시에 "물화된 몸의 영화(靈化)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화된 반복의 구조속에서 몸짓은 스스로 자기의 우주를 지니고 결국 몸짓은 몸짓 자체로 몸짓주체의 이른바 "존재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몸짓이 그것 자체로 주체가 되어 "세상을 바꿔 놓는 힘"으로 기능하고 몸짓 자체가 스스로 의미를 낳을 수 있으며 스스로 존재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승인하게 됩니다.
<힘>

사람은 먹고 마십니다. 그래야 힘이 생기기 때문이고, 힘이 나면 원하는 것을 대체로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참 이상해서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힘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바랍니다. 달리 말하면 최소한의 힘이라는 것이 실은 모호하기 그지 없고
힘은 많을수록 하고 싶은 것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힘은 몸의 힘이든, 마음의 힘이든 늘 엄연한 한계를 지니게 되는데, 그러기에 인간은 힘의 절정에 이르러 힘과 만나고 싶고, 힘의 근원에서 내가 그 힘과 더불어 움직이고 싶고, 마침내 내가 그 힘 자체와 하나가 되고 싶은 꿈마저 지니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유한한 가능성"으로서의 우리의 힘에 대한 인식, 그런데 이와 다른 "무한한 가능성"으로서의 힘의 실재에 대한 기대와 동경, 그리고 그러한 절대적인 힘에 내 존재를 근거시키려는 의지 등을 겪으면서 그러한 "힘"의 실재에 대한 긍정적인 고백을 문화화합니다. 그러한 힘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믿음, 그러한 힘에의 의존이 삶을 삶답게 하리라고 하는 기대, 그 힘을 얻고, 그 힘의 보우를 받고, 그 힘을 가능하면 "부릴 수도 있을" 삶의 차원에서 내 삶을 영위하고 싶은 기원, 그러한 것들을 현실화하여 다만 희구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승인하는 삶을 스스로 이루는 것입니다. 어쩌면 종교문화란 이러한 경험을 가장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삶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인간의 문화는 언제 어디서든 "신(神)"에 대한 담론을 결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논의 속에는 "신의 존재" 뿐만 아니라 "신의 부재"를 주장하는 내용도 포함됩니다. 신은 결국 인간이 희구하는 "힘" 그것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은 인간이 자신의 힘의 한계를 느끼며 온전한 힘을 희구하는 한,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이 있어 인간이 있다"고 하는 고백이 종교문화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지만 그 고백의 문화적 현실을 다른 말로 풀이한다면 그것은 "신은 인간이 있는 한 있다"고 할수 있는 그러한 "현상"입니다.
"절대성=궁극성=온전성=구체성=직접성=힘"이 다름 아닌 신인 것입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힘과의 만남이란 너무 엄청난 일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어떤 선택적 가능성도 지워버리는 "마지막 해답"과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힘과의 만남은 그 힘이 제시하는 해답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정황과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힘과의 만남은 "자유롭게 원하는 힘을 선택하고 싶은" 인간의 자존(自尊)을 훼손하고 "힘에의 아쉬움"과 자신의 자유로움을 잃고 싶지 않은 주체적 입장을 견지하고자 하는 태도 사이에서 인간은 절대적인 힘과의 "긴장"을 호흡합니다.
이러한 관계의 정황 속에서 우리는 이른바 "신과 인간 간의 매개기능"이 출현하고 있음에 주목합니다. 절대적인 힘과의 "간접적인 만남"이 더 현실성을 지닌 것입니다.
인류의 종교사는 일차적으로 사람들이 지고한 힘의 실재를 "하늘-님"으로 인식한다고 말합니다. 닿을 길 없고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인격화 현상이 우리 삶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이 절대적 힘의 실재로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재를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한 인격적인 존재로 만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를테면 "하늘의 길(天道)" 이라고 하는 이념적 실재를 승인하면서, 그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배움이나 수행으로 간접적인 과정을 통해서 절대적인 힘을 이념으로 환원하여 만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정치적 권력이 절대적인 힘을 대행하는 매개로 간주하는 예도 역사를 통하여 수없이 증언되고 있습니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이 그것인데 왕권이라는 것이 신이라는 절대적인 힘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정치적인 힘을 절대적인 힘과의 직접적인 조우의 불편함을 덜어주는, 현실속에 존재하는 신의 대리자라는 이해를 가지고 만나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왕권은 그 자체가 현실적으로 "신의 권력"입니다. 모든 힘은 절대성을 속성으로 지닙니다. 힘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모든 것은 적어도 그 힘이 발휘되는 한, 그 상황 속에서는 절대적입니다.
또 다른 간접적으로 절대적 힘을 만나는 경우는,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동원되는 모든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입니다. 지식과 기술이 바로 대표적인 것입니다.
아는 것은 그대로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힘은 '모르는 것이 없는 존재"로 여겨집니다. 지적 성취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함축합니다.
과학만능주의는 반종교적 문화가 낳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폐된 종교적 태도가 낳은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던 "힘에의 아쉬움"이 역사적 맥락에서 강화된 표상이라고 해야 더 옳을 듯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이러한 기여는 신의 일을 대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 다른 매개 개념은 종교공동체에서 "매개적 실재"로서 공동체를 통어(統御)하는
"사제(司祭)"입니다. 사제는 조직을 구성하는 기능의 하나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매개로서 힘을 지니고 있고, 스스로 정당하고 절대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멀리 있고 싶은 힘"에 대한 정서에서 "감히 다가가는 일을 감행하고 싶은 힘"에 대한 정서가 종교라는 문화를 빚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종교는 절대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다른 주장", "다른 해답에의 가능성"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고 "타협과 조화"가 불가능한 사태에 직면을 하게 됩니다.
"다른 주장에 대한 정죄"의 정서는 종교문화를 형성하는 성인(成因)이 되고 있습니다.
종교 공동체가 "살육"조차 감행하는 "싸움의 역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종교의 가르침과 모순이 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적인 힘을 경험하고 이 힘을 통해 현실적인 문제에 해답을 얻으려는 것이 종교문화라는 사실을 유념하면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종교사는 이러한 구조 때문에 서로 다른 종교간에, 그리고 하나의 종교이지만 다른 주장을 담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갈등하고 싸우는 비극적인 역사를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때나 곳이 없습니다. 종교사는 결코 "종교의 가르침"이 문자 그대로 구현되는 역사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힘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유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힘의 해답으로 추구하는 삶의 구조는 그 힘의 폭력적 행사를 "태생적"으로 배제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간과하는 종교문화의 가장 중요한 "실상"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힘의 모호성"
또는 직접적으로 묘사한다면 "폭력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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