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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Oct 13. 2016

<열림과 닫힘>3. 정진홍

<죽 음>

죽음처럼 분명한 "사실"은 없습니다. 어디서나 죽음을 만날 수 있고, 죽음은 필연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겪는 일이고, 누구나 아는 일이고,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라 "아무런 물음을 물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도 되는 것이 죽음일 지 모릅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전혀 다른 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실재경험은 죽음은 낯설기 짝이 없는 "비일상적인 것"으로 경험됩니다. 늘 부닥치면서도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가, 내가 죽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는 사실"로 기술이 됩니다.
"인식과 경험의 괴리"가 극명하고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모르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역설적인 사실"이 죽음에 대한 인식입니다.
사람들은 "일어난 죽음사건"을 의례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의례를 온갖 정성을 다하여 잘 다듬었습니다. 그 의례는 온통 비일상적인 몸짓, 비일상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더러워 다가갈 수 없지만 너무 깨끗하여 다가갈 수 없기도 합니다. 장례와 상례를 결한 문화는 없습니다.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언제나 금기를 깨뜨린다는 의식을 지니고 "감행"되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에 관한 발언은 애써 감추어 온 잠재된 불안을 충동합니다. 우울해지고 불안해집니다. 하지만 종교문화의 죽음진술을 보면 죽음물음의 불가피성을 조금도 간과하지 않고
오히려 금기가 되어 있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을 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죽음물음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가 곧 "죽음금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종교문화는 죽음을 종교적 사유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종교문화의 죽음담론은 결코 죽음을 종국으로 설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죽음 이후를 결한 죽음논의를 우리는 종교문화 안에서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문화의 죽음담론은 엄밀하게 말한다면 "죽음 이후를 위한 담론"입니다.
종교에서 죽음은 재생이나 부활로 설명되거나, 윤회전생으로 설명되거나, 이승의 삶이 끝나고 이어지는 저승에서의 삶으로 설명됩니다.
인간의 금기문화로서 죽음문화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실을 우리는 모든 종교에서 주장하는 살인 또는 살생의 금제에서 발견합니다. 이는 인간의 문제의 현실성을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인 예이고, "죽여버림"과 "죽어버림"의 비극이 인간의 가장 큰 근원적인 문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들이 빠지지 않고 가지고 있는 "죽음 이후의 그림"을 보면 죽음이후는 죽음 이전의 "보상"으로 전제하고, 이승에서의 삶의 당연한 결과가 "죽음 이후의 삶"으로 지속된다고 주장합니다. 천당이나 극락으로 불리는 긍정적인 보상과 지옥으로 불리는 부정적인 보상은 모두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심판"을 계기로 이루어지는데 그 심판이 이루어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다름 아닌 죽음입니다. 죽음만이 보상을 약속하는 해답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종교사에서 순교가 기려지는 많은 역사적인 서술을 읽을 수 있습니다.
순교는 절대적인 죽음의 절대적인 완성입니다. 죽임도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죽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살생 또는 살인은 피살자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을 전혀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기술을 전혀 종교사에서 찾아볼 수 없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죽임주체의 "죽이려는 절대의지의 거룩함"뿐입니다. 종교문화는 이처럼 "죽음권유의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살은 사실상 "죽음이 두려워 미리 죽음을 제거하려고 죽어버리는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일상의 곤고를 염두에 둔다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죽음대처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문화는 생명을 관리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이 "지고한 존재"일 수 없다는 논거를 가지고 이것이 절대자의 권한을 침해한다고 주장하고, 자연을 거스르는 일은 사람다운 삶이 아니라는 주장을 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사실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죽여버림"과 "죽어버림"이 갖는 구조적인 동질성입니다. 그것은 모두 "죽음은 문제의 해답"이라는 죽음이해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이고 싶고, 죽고 싶어 합니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종교문화는 궁극적으로 죽음논의를 통해서 죽음을 감당할 수 있는 개개인의 실존적 성숙이 이루어지도록 하면서 그 실존의 일상 속에서 묘연해지는 죽음의 행방을 자기 삶의 자리안에 정치(定置)하도록 하는 일, 그래서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도 그러한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사 회>

사람은 홀로 살지 않습니다. 더불어 사는 삶을 원하면서도 홀로 있고 싶어하고, 다시 홀로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어 더불어 살려고 합니다. 홀로 사는 삶의 문제가 "외로움"이고 더불어 사는 삶의 문제는 "괴로움"이라고 묘사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더불어 사는 삶이 아무런 문제없이 편안하고 즐거운 상태를 구현하게 하는, 어떤 가능성을 논리화 한 것이 사회통합인데,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합니다.
즉 통합된 사회를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오늘-여기의 우리사회"가 해체된 사회인 데 반하여, "그때-거기의 그들의 사회"는 막연히 "통합된 사회"였다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처음의 온전함에 대한 거의 "순수한 회상" 또는 "맹목적인 향수"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요순시대"를 일컫는 것이 그러한데, 사실 그 시절은 일어난 일을 실증할 수 있는 역사이전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이른바 "통합된 사회"가 실재한 적이 없는데도 그것을 "기억하고 회상한다"는 것은 예사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 "옛날"을 이른바 "온전한 사회"의 전형으로 삼습니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지금 여기에서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지금 여기가 아닌 것"에서 얻으려는 인간의 의식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통합된 사회는 "꿈의 실체"입니다. 즉 아무런 문제 없이 누구나 행복하게 사는 사회, 곧 "통합된 사회"는 "확인할 수 없는 회상과 실증할 수 없는 꿈"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문화는 이러한 "꿈의 실현"을 감당한 문화의 한 모습입니다.














[ 후 기 (後 記) ]

이 책은 평생을 종교학에 전념한 현재는 퇴임한 노교수의 저작으로서 인문학적인 성찰을 가지고 인간의 한 문화로서의 종교를 풀어 나간 책이라 하겠습니다. 지은이의 사유 안에서 인문학과 종교학의 결합으로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주체를 잃지 않고 종교문화에 다가가기를 원했다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접하고, 종교를 믿는 많은 종교인들을 보게 되지만, 사회 안에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수용되거나 또는 배척되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분야는 종교 외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종교에 대해서 느끼고, 알고 있던 지식과 경험의 편린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학문적인 어프로치에 의한 문장들을 통해 서로 얼개를 맞추어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문장을 구성하는 인문학적, 종교학적 용어들이 낯설고, 한번 읽고는 바로 입에서 녹아 들어오지 않아, 마치 딱딱하게 마른 육포나 오징어포를 씹는 듯한 상그러움이 있었으나 여러 번 곱씹다 보니 진한 사유의 육즙이 배어져 나와 입을 적시는 경험을 하곤 했습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그냥 지나쳐 버릴 만한 것이 없었고, 예전 독서토론 했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 대한 잠간의 언급이 있었는데, 한 줄 그냥 스쳐 지나듯 지나가 버립니다.

앎에 대한 언급에서 새로운 앎은 또 다른 모름과 이어지고 우리는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물을 수밖에 없다는 부분은 대선사였던 숭산스님의 "오직 모를 뿐" 이라는 평생 화두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오직 모를 뿐"에 천착할 때, 비로소 겸손의 자리에 서게 되고, 끊임없이 앎을 추구할 동인을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에 대한 파트에서 죽음담론이 최근 노무현 전대통령, 최진실 등의 자살로 인한 사회적 충격과 경험을 익히 한 상태에서 가슴에 와 닿는 부분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인간이 죽음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현상과 죽음으로 인해 종교가 인간사에서 한번도 빠짐없이 등장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이 책을 보고 종교인의 입장에서 종교학에 대한 비판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마치 물에 직접 몸을 담궈 수영을 해보지 않고 물 밖에서 수영의 자세가 어떻고, 수영의 종류가 어떻고를 논하는 것이 허무한 것처럼, 종교인의 입장에서 이 책 뿐 아니라 종교현상의 깊은 세계에 빠져보지 않고 학문적으로 논하는 것이 진정한 앎인가 하는 비판을 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우리가 종교인이기를 그만두면 비로소 우리는 인간일 수 있는데 이를 굳이 표현한다면 우리는 그때 비로소 종교적인 인간이 된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아주 함축적인 말인데, 스스로의 종교에 몰입되어 닫힌 마음을 포기하고 열린 사고를 가질 때 비로소 진정한 종교인이 되고, 사유의 인간이 된다고 하는 역설이라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불교에서 마치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라고 하는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제목인 “열림과 닫힘”을 마지막으로 다시 뒤돌아 보고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자는 아마 굳게 닫혀 있는 각 종교들의 체계를 벗어나, 보다 다양하고 통괄적인 "열린" 논의를 통해, 닫힌 사고의 독자들을 열린 종교의 세계로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된 제목이라고 생각하고 아마 그 의도가 충분히 전달이 된 역작이었다는 것을 언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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