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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Dec 08. 2016

<몽골제국의 힘 - 관용> <1>

<강자의 조건> 이주희 EBS

<강자의 조건> 이주희 EBS


“몽골제국의 힘 - 관용” <1>


                          강 일 송


오늘은 국가나 조직의 운명을 결정짓는 힘의 근원을 찾는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저자는 이주희PD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EBS에 입사

했으며 역사 전문 PD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그중 몽골제국의 관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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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제국의 유럽 침공


1235년 여름,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서는 쿠릴타이(족장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칭기즈칸이 사망한 후 중단된 정복전쟁을 재개하기 위한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침공 가능한 방향은 대체로 4곳이었는데, 우선 가장 가까운 남송

(南宋)이 있었다.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당시 세계에서 가장 풍요

로운 지역이었다. 두 번째 침공 후보지는 인도였다. 인도의 풍요로움에

대한 소문도 남송 못지않았다. 세 번째 후보지는 지금의 중동인 서남

아시아였다. 이 지역은 칭기즈칸 생전에 이란까지 정복했었고, 당시 세계

에서 가장 선진문명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마지막 후보지는 유럽이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먼 곳이었고 가장 낯선

곳이었다.


그때 칭기즈칸의 가장 훌륭한 장군 중 하나였던 수베데이가 유럽침공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실 수베데이는 이미 이곳을 공격해본 경험이 있었

다. 동유럽의 평원지대에서 러시아군을 간단하게 몰살시킨 후 크림반도까지

진출했었고, 거기서 제노바 상인들을 통해 동유럽 각지에 제법 많은 도시

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던 것이다.


결국 우구데이대칸은 유럽원정군과 남송원정군으로 나누어 동시에 진격

하기로 결정했다.

유럽원정군의 본대는 카라코룸을 떠나 6,000킬로미터가 넘는 원정길에

나섰다. 그들이 진격해오자 동부유럽과 발트해 국가들은 공포가 번지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도시들을 정복하며 서진을 계속하던 몽골군이 동유럽 최대의

도시였던 키예프에 도착한 것은 1240년 11월이었다.

혼란과 아우성 속에 키예프는 한 달도 버티지 못한 채 함락되었고,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역이 몽골의 수중에 들어왔다.


다음 목표는 폴란드와 독일이었다. 폴란드와 독일은 슐레지엔 영주 하인

리히 2세를 중심으로 3만이 집결했고, 당시 유럽 최강이라고 불리던 튜튼

기사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몽골과 연합군의 전투는 현재 독일과 폴란드

의 국경에 있는 레그니차에서 벌어졌다. 결과는 참혹했다.


유럽의 풍전직화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1242년의 봄, 유럽의 왕들은

몽골군의 다음 행보에 대한 정보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몽골군이 썰물

빠지듯 중부유럽으로부터 물러나 버렸다.


대칸이 서거하였기 때문은 몽골군의 완전히 철수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다음 칸을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에 참석해야 했다. 당시 유럽

원정군을 이끌던 바투는 칭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장남으로 다음 칸이 될

후보였으므로 서둘러 귀국할 필요가 있었다.


몽골군이 떠나자 신앙심이 깊었던 중세 유럽인들은 곳곳에서 신에게 감사

기도를 드리는 미사가 열렸다. 그리고 더 이상의 죄악이 발붙이지 못하

도록 하기 위한 피의 속죄가 시작되었다.

자신들을 이토록 커다란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것은 바로 “유대인들의

극도한 사악함” 때문이라는 것이 속죄의 명분이었다.

런던에서부터 로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대인들이 화형대로 끌려 나왔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을 실제로 공포에 빠뜨린 무시무시한 적 몽골군을 물리

칠 힘은 없었지만 자신들이 상상해낸 내부의 적인 유대인들을 벌줌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런던대학교 아시아, 아프리카 연구소의 조지 레인 교수는 인터뷰에서


“몽골제국의 주요 특성 중 하나는 새로운 것에 적응하고, 학습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점령 후 몽골은 적들을 그들의 군대에

영입하였습니다. 이들과는 정복민과 피정복민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몽골제국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장인, 전문가, 기술자,

등도 영입이 되어 도시를 포위하는 기술을 전수해주었습니다.

대단한 것은, 당시 몽골제국에는 전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인원들을 자유롭게 충당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중국의 군사전문가들을 이용하였고, 페르시아의 기술자나 전문가를 이용

했습니다. 심지어 이집트인을 고용하여 화약부문에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일방적인 강제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합니다. 몽골제국으로 온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일종의 주주라고 생각하고

자발적으로 몽골로 왔습니다.”


결국 초원의 가난한 유목민에 불과했던 몽골족을 세계에서 가장 앞선

기술력으로 무장시킨 힘은 바로 이방인들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줄

알았던 몽골제국의 “관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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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강자의 조건이라는 책 중 몽골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조그만 부족들이 모여 살았고, 문자조차 없었던 그들이 많은 숫자의 군대도

없이 전 세계를 호령하였습니다.


그들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마지막 결론은 “관용”이었습니다.

물론 저항하면 몰살을 시키고 응징을 하였지만, 투항을 하면 그대로 몽골

제국민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행정과 종교 등을 허용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왕 루이 9세는 몽골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침공을 받지

않기 위하여 수도사였던 ‘기욤 더 루브룩’을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으로

파송합니다.

이곳에서 루브룩은 당시 어떤 세계에서도 볼 수 없었던 광경을 만납니다.

그곳은 모든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여 이슬람 성전, 기독교 교회, 불교

사원, 소림사 지부, 주술사 등이 작은 공동체에 속해 살았습니다.


다른 문화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관용이 몽골제국을 지탱한 힘이었던

것입니다.

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세계의 인재들을 가장 많이 모으고 있는

미국이 다양성을 무기로 최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요.


다음에는 “대영제국”의 번영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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