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클, 감동이 되는 글>

“신경림 시인이 택한 인간적으로 좋은 글” 中

by 해헌 서재

<뭉클, 감동이 되는 글> 신경림

-- “신경림 시인이 택한 인간적으로 좋은 글” 中


강 일 송


오늘은 우리 문단의 원로이자 따뜻한 시인(詩人)인 신경림 시인

이 60년 시인의 길을 걸으면서 만난 가슴 뭉클한 수필들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신경림(1935~)시인은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등이 추천

되어 등단을 하였고,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길” 등

많은 시집을 내었습니다.


오늘은 그중 몇 편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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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무 살 어머니 -- 정채봉(1946-2001)


회사에 여고를 갓 졸업한 신입 사원이 들어왔다. 키도 작고 얼굴도

복숭아처럼 보송보송하다.

한번은 실수한 일이 있어 나무랐더니 금방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

뜨렸다.


여자 나이 스무 살, 소녀에서 성인으로 턱걸이를 하는 저 나이.

무엇이거나 그저 우습고 부끄럽기만 한 저 시절.

나는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이 났다. 우리 어머니가 하늘의

별로 돌아가신 나이가 바로 저 스무 살이었던 것이다.


열일곱에 시집 와서 열여덟에 나를 낳고 꽃다운 스무 살에 이

세상살이를 마치신 우리 어머니. 그렇기에 나는 어머니의 얼굴도

모른다. 그러나 때때로 어머니의 내음은 떠오르곤 한다.

바닷바람에 묻어 오는 해송 타는 내음.


나를 키우신 할머니가 부엌에서 군불을 때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자, “너 없는 사이 너그 담임 선생님이 다녀가셨다.

작문 시간에 ‘어머니 냄새’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었다면서?”

“이상한 일이다. 해송 타는 냄새에 네 에미가 떠오르다니..

허긴 너의 외가 가는 길이 솔밭길이긴 하다. 너를 업고 네 에미가

몇 번 다녔으니 그 솔냄새가 너희 모자한테 은연중에 배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서른한 살 때 나는 아이 하나를 얻었다. 처음엔 보채기만 하더니

예닐곱 달이 되면서부터는 이쁜 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아이가 귀여워서 입을 맞추다 말고 해송 타는 내음을

느꼈다.


오늘도 하얀 박속 같은 스무 살 우리 어머니는 그 앳됨 그대로

를 지니고 사진틀 속에서 당신보다 더 늙어가는 아들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계신다. 풋콩에서와 같은 비린내 나는 부름이 들릴

듯도 한데..


그러나 이제는 해송 타는 내음마저도 점점 엷어져가는 것 같아

나는 참 가슴 아프다.



★ 루시 할머니 -- 장영희(1952-2009)


가끔 우리는 ‘운명의 장난’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예기치

않았던 어떤 일로 말미암아 엉뚱한 일이 발생하거나 우리의 의지

와 상관없이 삶의 행로가 바뀔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이북에 두고 온 남편을 오랜 세월 동안 기다리다가

결혼하니 바로 다음날 남편이 찾아왔다든가, 이제껏 키운 자식이

알고 보니 산부인과에서 바뀐 다른 사람의 아이였다든가 하는

일들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보스턴에 있을 때, 내가 살고 있는 7층 아파트에 하나밖에

없는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일이 있었다. 난 꼭대기 층에 살고

있었고 본디 나는 몸이 불편한 지라, 아파트를 관리하는 부동산

회사에 다른 아파트로 옮겨 달라고 요구했는데, 법적인 책임이

없다하여 문제가 생겼다.

결국 부동산회사가 잘못을 인정하고, 약간의 보상과 함께 앞으로

장애인 세입자에 관한 특별한 배려를 약속했는데, 이것이 기사화

되면서 졸지에 ‘유명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더 깊이 남아 있는 사건은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것을 계기로 루시 메리안 할머니와 만나게 된 일이다.

루시 할머니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80세 정도의 노인인데,

한번은 내가 층계를 한 계단씩 천천히 오르는 모습을 보고 안타

까운 나머지 911 구조대에 신고를 했고, 큰 소방차 두 대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나타나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쳐다

보는 가운데 구조대원 네 명이 나를 작은 소방용 의자에

앉혀 가마처럼 7층까지 들어올렸다.


그 이후 내가 외출했다 돌아올 때면 4층에 사는 할머니의

아파트는 종종 나의 쉼터가 되어주었다. 안 그래도 말벗이

필요했던 할머니는 간단한 음식까지 내어놓고 많은 얘기

를 했다.


할머니는 말버릇처럼 아주 하찮은 일에도 ‘운명의 장난으로,

by twist of fate'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예를 들어 기다리던

드라마를 보려는데 전화가 왔다든지, 시금치를 사러 갔더니

운명의 장난으로 그날따라 시금치가 다 팔렸다든지,

좀 우스운 일까지 운명의 장난을 갖다붙였다.


루시 할머니는 30년 이상 이 아파트에 살지만 ‘운명의 장난’

으로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한다고 했다. 젊었을 때 직업이

엘리베이터걸이었던 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엘리베이터에

갇힌 이후 협소공포증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후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했는데 탄식조의 그녀가 갑자기

생기를 띠며 말했다.


“그런데 영희, ‘운명의 장난’은 항상 양면적이야. 늘 지그재그

로 가는 것 같아. 나쁜 쪽으로 간다 하면 금방 이것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군, 하는 좋은 일이 생기거든. 협소공포증으로

엘리베이터걸을 그만 둔 후 나는 정원 장식용 가게의 점원

으로 취직했고 거기서 죽은 우리 남편을 만났지. 재작년 그

사람이 가기 전까지 우린 53년을 같이 살았어. 남편을 만난

건 내 삶에서 가장 큰 축복이었어.”


안식년을 맞아 몸과 마음을 좀 ‘안식’하기 위해 이곳에 온

내게 엘리베이터 사건은 나쁜 ‘운명의 장난’에 속하지만,

그 일로 루시 할머니를 만났고, 가마 타고 7층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호사도 누려보았고, 이 세상에 참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달았고, 또 이렇게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겼으니 루시 할머니의 ‘지그재그’

운명론이 실제로 증명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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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편의 수필을 보았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저자가 이미 고인이 되어 더 이상 이분들의

작품들을 볼 수가 없군요.


때로는 내가 서평이랍시고 덧붙이는 게 원글에 누가 되는 듯한

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러합니다.


그냥 편안히 두 분의 글을 읽고 편안히 느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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