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헌 서재 Jul 30. 2017

<그리스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그리스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강 일 송


오늘은 “로마인 이야기”로 이름높은 작가 일본의 시오노 나나미의 새로운 작품인

“그리스인 이야기Ⅰ”을 보려고 합니다.


시오노 나나미(1937~)는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63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혼자서 르네상스와 로마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1968년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연재하면서 작가로 데뷔하였고, 이탈리아에 정착하면서 도전적 역사해석과 뛰어난 필력

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왔습니다.


이번에는 로마보다 더 오래된 서구의 역사인 “그리스인 이야기”를 집필하고 민주주의의

태동부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


★ 도편추방(Ostracism , 陶片追放)


당시의 종이는 파피루스를 재료로 만든 것으로, 이집트에서 수입해야 해서 가격이 비쌌다.

한편 도자기의 파편은 아주 많았는데, 따라서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투표는 지참한 작은

칼로 그 도기 파편에 문자를 새기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도편은 투표용지로 사용되었고, 추방해야 할 사람을 뽑을 때도 활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클레이스테네스(BC 525~524)가 발명했다는 도편추방의 경우는

다른 투표와 목적이 달랐는데,

첫째, 이 투표의 목적은 도시국가 아테네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국외에 추방

하는 것이었다.

둘째, 이 목적에 따른 투표는 1년에 1회로 한다.

셋째, 투표에 참가한 사람이 6,000명 이상이 되어야 하고 6,000명이 넘지 않으면 정족수가

미달로 성립되지 않는다.

넷째, 전체 투표자의 과반수가 이름을 적은 사람은 10년 동안 국외 추방에 처한다.


도편추방의 대상은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지 ‘해를 끼친 인물’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재판관이 아니라 일반 시민, 즉 정치의 역할이었다.

또한 도편에 의해 추방된 사람은 범죄자가 아니었기에 재산을 몰수하지 않았고 가족은

아테네에서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었다. 추방된 10년 동안 재산을 관리할 사람을 지명

할 수 있었고 그 사람으로부터 송금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 대상은 중요한 인물이어야 했고 따라서 도편추방을 당하는 사람은 아테네 정계의 거물

이었다.


클레이스테네스가 살던 시대에는 도편추방에 의한 희생자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가 죽고

8년이 지난 다음부터 유력 정치가들의 추방이 빈번했다.

도편추방은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이 되었고, 마지막 도편추방은 기원전 417년에 일어났다.

이 때, 대립하는 두 거물 가운데 한 명이 도편추방을 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밀약이 이루어져 전혀 관계가 없는 제3자가 추방되었고.

이렇게 되자 아테네 시민도 마침내 눈을 떴고 그 후 도편추방은 폐지되었다. 입법된 뒤

85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 아테네의 중산계급의 존재


참된 의미에서 민주정치의 창시자라면 클레이스테네스이다. 왜냐하면 민주정치 자체라면

이미 에게해에 있는 키오스 섬이나 아테네에 인접한 메가라에서도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아테네와 이 두 도시의 차이는 민주정치를 확립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있다.

그렇다면 아테네는 어떻게 민주정치를 확립했을까?, 이것은 아테네만이 오직 중산계급을

정착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솔론이 첫걸음을 떼고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경제력을 더했으며 그 뒤를 계승한 클레이스

테네스가 개혁을 단행해서, 아테네는 스스로 생산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건전한 중산계급’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잘게 분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편성한 것이

사회 격차를 줄였다. 중산계급의 존립 없이는 민주정치가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오늘날 세계정세에서도 실제로 증명되었다.


★ 플라타이아이 전투(BC 479년)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해전 이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은 총사령관 마르도니우스에게

군대를 지휘하여 그리스연합군을 상대하게 했다. 그리스연합군은 파우사니아스라고 34세의

젊은 장군이었다. 첫 접전에서 3배에 가까운 수가 더 많은 페르시아군이 기병단장의 전사로

물러났고, 테베라는 확실한 보급처가 있던 페르시아는 보급처가 불투명한 그리스 군대의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그리스 연합군을 혼란하게 했다.

그리고 페르시아 군대의 자랑인 기병을 출동시켰는데, 그리스의 중무장 보병은 긴 창으로

기병의 말을 쓰러뜨리고 장비가 더 우수했던 그리스 보병은 페르시아의 대병을 완전히

유린했다.


또한 페르시아의 총사령관 마르도니우스를 스파르타 병사가 발견해 멀리서 돌을 던져 정통

으로 머리를 맞혀 말에서 떨어지자, 페르시아 군대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방책 너머로

달아난 페르시아 병사를 울타리 안에 든 양을 죽이듯 살육했다.

헤르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는 7만 명 이상이 전사를 했고, 그리스는 1300여 명

이었다고 한다.


그날 밤 승리 축하연은 페르시아 왕 크레스크세스가 마르도니우스에게 남기고 간 호화로운

천막에서 열렸다.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의 모든 사령관과 대장이 초대된 자리에서

총사령관 파우사니아스가 말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이렇게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그리스를 정복하려고 한 걸까.”

이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 페르시아전쟁의 결과


대부분의 역사 연구가들은 그리스인이 페르시아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자기들이 가진 자질에

대해 눈을 떴고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페르시아는 ‘양’으로 압도하는 방법으로 공격해 왔다. 그리스는 ‘질’로 맞서 싸웠다.

이때 ‘질’이란 개인의 소질보다는 모든 시민이 지닌 자질을 활용한 종합적인 질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그리스는 승리했다.


이 2차 페르시아전쟁이 종료되면서 에게해를 둘러싼 패권은 그리스에게로 넘어왔다.

이후 기원전 334년부터 시작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까지 144년 동안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는 전쟁이라고 할 만한 규모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


오늘은 시오노 나나미의 최근 작품을 함께 보았습니다.

주로 로마와 르네상스 이야기에 천착하던 작가는 로마보다 더 오래된 서양문명의

원형인 그리스를 찾아갑니다.


첫 번째는 도편추방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도편은 도자기의 파편을 말합니다.

비싼 파피루스를 구하기 힘들어, 흔한 도자기 파편에 각자가 가진 칼로 자기 의사

를 표현하여 투표를 하였는데, 민주정치의 시작을 이끌었다는 클레이스테네스(BC 525~524)가 이것을 만들었다 합니다.

물론 나중에는 정적끼리 공모하여 제 3자를 도편추방하는 일로 인해 없어

지는 계기가 되었지만, 다수가 참여하는 시민정치의 시작을 말하는 의미있는

정치행위였음은 확실합니다.

또한 아테네에서 민주정치가 확립된 이유가 경제적으로 안정된 "중산계급"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데, 현재 우리나라

뿐아니라 전세계적인 지나친 부의 양극화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페르시아전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수가 훨씬 많았던 페르시아

군대보다 그리스의 군대가 승리를 한 것은 질적으로 우수한 중무장 보병이 있었

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긴 창을 이용하여 기병을 효과적으로 상대한

그리스군이 페르시아 대군을 물리칩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현대의 전문가들은 실제로 두 군대의 수 차이는 크지 않았

다고 지적합니다.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이 되기가 쉽고, 서양문명의

후예들은 당연히 그리스의 편에서 두고두고 역사를 파악했을 것이 자명하기에

좀더 중립적인 의미에서 되짚어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책은 명불허전으로 시오노 나나미

답게 아주 흥미롭고 다채로운 역사 서술이 돋보입니다.

일독을 권해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