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1)
--“답사기, 드디어 서울을 이야기하다”
강 일 송
오늘은 인문학책으로는 불후의 베스트셀러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 서울편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제 1권인 “남도답사 일번지”가 세상에 나온 지 25년만이라고
합니다.
저자인 유홍준(1949-)교수는 서울대 미학과에서 학사,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를 합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했으며, 영남대 교수, 명지대 대학원장, 문화재청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오늘은 서울편 중 창덕궁의 “낙선재”에 얽힌 이야기들을 한번 풀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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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선재의 역사
창덕궁 내전의 동쪽 마지막 공간에는 낙선재가 있는데, 이 곳의 주인공은 헌종(1827-1849)
이다. 헌종은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아버지 효명세자의
사랑을 받았으나 아버지 효명세자와 할아버지 순조가 사망하자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헌종은 문인 학자들과 자주 만나면서 그들의 삶을 동경했고, 1847년 창덕궁에 문인들의
사랑채를 본뜬 낙선재를 지었다. 헌종은 이곳에 문인들을 자주 초청하여 함께 시사회를
즐기었다.
이런 내력으로 궁궐 건물이지만 여염집 사랑채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하여 궁궐부터 민가
까지 조선 건축의 모든 것이 창덕궁에 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다.
★ 낙선재의 왕가이야기
헌종 사후 주인을 잃은 낙선재는 상궁들의 처소로 사용되다가 이후 왕가의 사람들이 사용하게
된다. 고종의 직계로 장성한 네 자녀인 훗날의 순종황제,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가 있었
는데, 일제를 황실을 이왕가로 격하하고, 정략결혼으로 황손들을 사실상 인질로 삼았다.
1926년 순종황제가 죽고 남겨진 세 남매는 해방후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모두 버림받는 신세
가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껄끄럽게 생각해 입국을 허가하지 않았고, 이들이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귀국한 것은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1962년 이후의 일이며, 의친왕을 제외
하고는 모두 낙선재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영친왕 이은(李垠)은 고종과 귀비 엄씨 사이에 태어난 순종의 이복동생으로 1907년 황태자로
책봉이 되었다. 하지만 1920년 일제는 일본 왕족의 달 마사코(이방자 여사)와 정략결혼을
시켰다. 사실상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영친왕은 일본 육사를 마치고 육군 중장까지
지냈다. 1963년 비로소 귀국했으나 이미 뇌혈전증으로 실어증에 걸린 상태였다.
1970년 투병생활을 하다가 74세로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친왕비인 이방자여사는 1963년 영친왕과 함께 귀국한 후에 장애인 복지사업에 전념했다.
그는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환영받지 못한 삶을 살았으며 1989년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종이 환갑 나이에 귀인 양씨에게서 낳은 덕혜옹주는 8세에 아버지 고종을 잃고 14세에
유학을 명분으로 어머니와도 헤어진 후 대마도의 번주 소씨와 정략결혼했다. 결혼 전후
신경쇠약 증세를 보인 덕혜옹주는 마침내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고 일방적으로 이혼당하
였다. 1962년 천신만고 끝에 서울로 돌아온 그녀는 1989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는 영친왕과 이방자여사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이구는 도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MIT 공대 건축가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뉴욕의 아이
엠페이 건축사무소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8살 연상의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과
결혼했다. 이구는 귀국 후 서울대 등에서 건축학 강의를 했고, 1966년에는 건축 설계
회사인 트랜스아시아의 부사장을 취임했다. 이후 신한 항업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실패
했고 2005년 자신이 태어난 곳인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세상을 떠났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마지막 황세손의 장례를 낙선재에서 치르고 싶어했다.
황세손의 장례는 낙선재에서 9일장으로 화려하고 엄숙하게 치러졌다. 나라에서는 이해찬
국무총리가 참석하여 조사를 바쳤다.
황세손 이구의 장례식으로 조선왕조의 적통은 그렇게 끊어졌다. 장례가 끝난 후에는
전주 이씨 종친회에서 낙선재에 궤연을 설치하고 2년 상이 끝날 때까지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상식(上食)을 올렸다. 그것이 조선왕조 왕손들이 창덕궁과 인연을 맺은
마지막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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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현대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중 서울편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창덕궁의 낙선재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감정을 불러 일으켜서
낙선재를 중심으로 엮어보았습니다. 낙선재를 지은 헌종은 짧은 재위기간도
그러하지만 존재감 자체가 적은 왕 가운데 한명이라 합니다.
하지만 헌종은 문예에 능한 왕이었고, 낙선재를 지어 여염집 사랑채처럼 쓰면서
많은 시인들과 교류를 하였다고 하지요.
그의 후손들은 일제에 의해 치욕적인 강제 결혼, 일본으로 볼모로 잡혀가는
일들을 겪지만, 불행하게도 광복이 된 후,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서 버림 받은
존재들이 됩니다. 특히 덕혜옹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채 느끼기도 전에 아버지
를 여의고 대마도 번주에게 강제 결혼을 하여 떠나게 됩니다.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도 겉으로는 MIT를 나온 엘리트 건축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 길은 가슴 아프기까지 합니다.
오늘은 크게 창덕궁의 낙선재의 아름다운 건축미와 헌종의 학문에 대한 사랑을
살펴보았고, 구한말에 왕실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이곳
낙선재에서 대부분 어떻게 스러져갔는지를 보았습니다.
역사에서 만일(If)은 있을 수도 없고 큰 의미가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이조 왕가
의 사람들에 대입을 해 본다면, 이들이 만일 일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정할 때, 이들이 이러한 삶의 고통들을 피할 수 있었을까 자문해 봅니다.
오늘 이 책은 서울의 숨겨진 역사와 모습들을 세세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한번 종묘와 창덕궁을 이 책의 안내를 따라 거닐어 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