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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Oct 10. 2017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2)>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까지의 여정”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2)> 유홍준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까지의 여정”


                                   강 일 송


오늘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 서울의 2편을 보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창경궁 안의 낙선재 이야기와 조선왕가 마지막 이야기를 하였었습니다.

이에 연이어 2편에서는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이 도읍으로서 낙점되기까지의

많은 이야기들을 살펴볼까 합니다.


저자인 유홍준(1949-)교수는 서울대 미학과에서 학사,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를 합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했으며, 영남대 교수, 명지대 대학원장, 문화재청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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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0년 전의 계획도시


서울은 600여 년 전에 치밀하게 조성된 계획도시라는 점에서 세계건축사에서 빛나는 한 장을

차지한다. 그 무렵 유럽의 도시들도 시청과 성당을 중심으로 설계되기는 했지만 서울처럼

인구 10만에서 20만을 수용하는 대규모 도시건설사업은 아니었다.


서울의 경우, 이성계의 명을 받은 무학대사가 조선의 도읍으로 정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무학대사가 한양 정도(定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양 땅이 조선의 수도로 확정되는 과정은 아주 신중하고도 신중했다.

풍수에 높은 안목과 학식 있는 당대의 경륜가들이 총동원되어 검토한 결과였다. 학자마다

여러 곳을 신도읍 물망에 올렸고 공사를 시행에 옮기기도 하면서 몇 차례 자리를 이동하는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다다른 결론이었다.


새 도읍지 물색 과정에서 벌인 열띤 논쟁은 아마도 세계건축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그 진지한 노고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랜드마크 건축이 필요없는 도시 서울


서울은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다. 대한민국의 수도로 자체 인구 1천

만명, 수도권까지 합치면 2천 5백만 명, 총인구의 반 이상이 삶을 영위하는 대도시다.

옛날 당나라의 수도가 장안이었던 시절, “장안의 풀로 태어나는 것이 지방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는데 지금의 서울이야말로 모든 분야의 최고와 최하가 공존하면서

모순 속에서도 우리 시대 문화를 선도해 나아가고 있다.


서울에 살 때는 잘 느끼지 못하다가도 어쩌다 해외 답사를 마치고 귀국해 인천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며 난지도쯤을 지날 때면 유유히 흐르는 한강 너머 길게 펼쳐진 북한산 줄기가

눈에 들어온 순간 이 아름다운 곳을 정해준 조상들께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서울에 처음 찾아오는 이방인을 맞이하여 올림픽대로를 타고 달릴 때 한강 건너 먼 산을

가리키며 그들에게 저 산 밑에 서울 시가지가 있다고 하면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어떻게

도심 속에 저렇게 준수한 산이 있고 어떻게 이처럼 장대한 강물이 도시를 가로지를 수 있느

냐며 이구동성으로 ‘믿을 수 없다, unbelievable’을 연발한다.


1992년 백남준 회갑 기념전 때 미국의 미술평론가인 엘리너 하트니는 비디오아트라는 주제를

거론하기에 앞서 서울의 첫인상부터 말했다. 서울은 동서남북 어느 시점에서 보아도 아름

다운 산이 들어오기 때문에 파리의 에펠탑 같은 랜드마크 건축물이 필요 없는 도시라는 점

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물론 서울의 자리앉음새에 대한 예찬을 이방인만 노래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우리 선조들이

더했다. 조선왕조의 역대 왕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문인들이 서울을 찬미한 시를 남겼는데

그 누구보다도 한양에 신도읍을 건설한 장본인으로 감회가 남달랐을 태조는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그 감격과 뿌듯함을 이렇게 노래했다.


우뚝 솟은 높은 산이 하늘과 맞닿았으니

한양은 하늘이 열리면서 이루어진 것이로다

굳건한 대륙은 삼각산을 떠받치고 있고

오대산에서 내려오는 긴 강물은 바다로 흘러든다.


★ 고려시대의 한양


고려시대의 한양은 한때 남경(南京)으로 불리며 평양의 서경(西京), 경주의 동경(東京)과

병칭되었고 별궁도 있던 고을이었다. 신라시대에는 한양군(漢陽郡)이라 불렸고 통일신라

때 양주(楊州)로 이름이 바뀌었고 고려왕조에 와서도 이 이름이 유지되었다.

서울의 전신이 곧 양주였다. 고려 문종때 양주가 더 격상되어 ‘남경 유수부’, 줄여서 남경

이라 불렸고 별궁도 들어섰다.

고려때의 한양을 그 자취를 찾기가 어렵지만 고려의 별궁이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 청운동

쯤에 있었으며 남경의 관아는 지금의 교동 운현궁 자리에 있었고 시가지는 청계천변을

따라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계룡산 신도안의 건설


태조는 애당초 새 도읍지로 한양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1393년 풍수지리에 정통한

태실증고사 권중화가 계룡산 아래에 새 도읍을 구상한 “계룡산 도읍도”를 그려서 헌상

하자 태조는 여기에 큰 관심을 보였고, 마침내 신하들을 대동하고 계룡산으로 현지 답사

를 떠나기까지 하였다. 태조는 성격이 급한 편이었는데, 여기에 신도를 건설할 것을 결정

하고 감독관을 임명해서 공사에 들어갔다.


착수한 지 9개월이 넘어 한창 터닦기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경기도관찰사인 하륜(河崙)이

계룡산 신도의 부당함을 진언하고 나왔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되나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과 풍수상 맞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태조는 정도전, 권중하 등 대신들로 하여금 다시한번 풍수 이론을 따져보기를 명했고

대신들이 신중히 검토한 결과 하륜의 상소가 맞았다고 결론을 내어 중단하게 된다.

지금은 1980년대 3군사령부인 계룡대가 이곳에 들어서게 된다.


★ 다시 한양으로


태조는 하륜에게 직접 천도할 땅을 조사해보라고 명했고, 하륜은 신도읍의 후보지로 서울

무악산 남쪽, 오늘날 신촌,연희동 일대를 제시했다. 하지만 다른 대신들은 지세와 지형을

면밀히 조사한 다음 무악산 남쪽은 땅이 좁아 도읍으로 불가하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이후 태조는 남경(한양)을 지나가던 중 이곳의 지세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동행한 대신

들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윤신달 등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경내에서는 송경(개성)이 제일

좋고 여기가 다음갑니다. 아쉬운 바는 북쪽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뿐입니다.”

라 했다. 왕은 무학대사에게도 물었더니 “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어 결정하소서.”


개성으로 돌아온 태조는 곧바로 정도전을 한양에 파견해 도시건설 전체를 맡기고, 신도읍

조성 임시본부인 ‘신도 궁궐 조성도감’을 설치하여 심덕부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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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울편 중 2번째를 보았습니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이자, 그 이상의 상징성과 존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자부심이 지나쳐 오만함으로 비칠 정도의 의식을 낳기도 하였는데,

서울 아니면 모든 곳이 다 '지방'이고 '시골'이라는 의식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서울지방검찰청', '서울지방법원', '서울지방경찰청'등의

명칭은 아주 합리적이지요.


이러한 서울이 조선의 개국과 함께 도읍으로 선정되기까지의 과정을 유홍준청장

의 설명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평양을 서경, 한양을 남경, 경주를

동경이라고 불린 것도 그렇고, 한양의 옛 지명이 한양군, 양주 였다는 것도요.


우리는 흔히 무학대사가 한양을 도읍으로 혼자서 정한 것처럼 알고 있지만 오늘

내용을 통해서 많은 학자들과 전문가들이 많은 후보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거쳐 탄생한 것이 한양의 도읍선정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계룡산 아래 터가 도읍이 되었다든지, 무악산 아래 신촌 일대가 도읍이

되었다면 지금과 전혀 다른 역사가 진행되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해외 어느 도시를 가보아도, 서울처럼 큰 한강이 가로지르고, 북한산처럼 뛰어난

산이 뒤에 버티고 있는 곳은 드뭅니다.  북한산은 서울에 가까이 있어서 저평가된

대표적인 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지요.


우리의 자랑스런 수도, 서울을 이번 나의문화유산답사기 2권을 통해서 새롭게

많이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책에 있는 유산을 하나씩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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