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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Oct 21. 2017

<처음부터 다시 읽는 친절한 세계사>(2)

<'국민국가'의 탄생 - 미국독립전쟁에서 비롯된>

<'국민국가'의 탄생 - 미국독립전쟁에서 비롯된> (2)

--“처음부터 다시 읽는 친절한 세계사” 中


                                      강 일 송


오늘은 과거 인기를 끌었던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의 저자가 쓴 “처음부터 다시 읽는

세계사” 두 번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왕이 지배하던 국가의 프레임이 아닌 국민이 주인 되는 “국민국가”의 개념이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오늘 저자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자인 미야자키 마사카츠(1942~)는 도쿄교육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후 도립미타고등학교,

도립구단고등학교, 쓰쿠바 대학 부속 고등학교 등의 교사, 홋카이도교육대학 교수를 거쳐

강사와 저술가로 활동중입니다.


저서로는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1,2”, “하룻밤에 읽는 중국사”, “술의 세계사”, “이슬람

네트워크”, “해도의 세계사”등 다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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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턴에서 불붙은 “시민혁명”


19세기 들어와 기존의 왕이 주인인 주권국가 대신에 대서양 주변의 유럽과 남북아메리카

에 ‘국민국가’가 확산되었다. 국민국가의 확산의 전제는 대서양 세계에서의 ‘자본주의’

경제의 보급이다.

19세기 정치 변동의 기점은 ‘미국 독립전쟁’으로 그 출발점은 마국 동부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 보스턴이었다.


프랑스와의 ‘프렌치-인디언 전쟁’(1775-1763)에 승리한 영국은 멕시코 이북에 위치한

북아메리카에서 패권을 확립했다. 프랑스와의 오랜 식민지 전쟁으로 1억 3천만 파운드에

이르는 국채를 지게 된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해 인지세, 물품세를 징수하려 한다.

하지만 식민지는 “대표 없이 과세없다”(자신의 대표자가 의회 참석이 안 되는 과세는 부당

하다는 논리)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항거를 한다.


★ 보스턴 차 사건


1773년 영국 정부가 영국 동인도회사에게 식민지에서의 차의 독점적 판매권을 부여하는

‘차 조례, Tea Act'를 내놓자 유럽에서 밀수한 홍차로 이익을 보던 상인들이 보스턴에서

급진파와 손을 잡고 반대운동을 강화했다. 그리고 12월 동인도회사 선박이 입항하자

인디언 분장을 한 50여 명이 100만 달러어치의 홍차 342상자를 바다에 던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보스턴항이 폐쇄되고 본국군대가 파견되었고, 1775년 보스턴 근교의

렉싱턴에서 식민지의 민병과 본국군이 무력충돌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 주권재민과 사회계약설


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식민지는 ‘왕’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 어디에도 없는

왕이 없는 새로운 사회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다. 이에 존 로크의 ‘사회계약설’이 도입

되었다. 사회계약설이라는 이념에 의거하여 혁명권 행사를 이유로 기본권을 짓밟는

영국 왕을 배제하고 국민이 주권자가 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가 설명되었다.

인권사상이 밑바탕에 깔린 새로운 국가관이 제시된 것이다.


독립전쟁의 과정에서 영국의 약체화를 노리는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식민지군이 1781년 ‘요크타운’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1783년

파리조약으로 미국의 독립이 승인되었고, 1787년 미합중국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1789년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 미국 독립전쟁에 이어 발생한 프랑스 혁명


영국의 중상주의 정책으로 식민지에서의 공장건설이 인정되지 않아 무기 및 탄약을 제조

할 수 없었던 식민지군을 도운 것이 바로 프랑스의 부르봉왕조였다. 부르봉왕조는 영국

의 힘을 약화하기 위해 영국의 13개 식민지 독립을 도왔는데, 10년도 채되지 않아 프랑스로

불똥이 튀었다.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원한 탓에 국가재정이 악화되었고 흉작마저 지속되어

귀족들까지 과세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귀족들은 1651년 이후 폐지되었던

‘삼부회’(귀족, 성직자, 평민으로 구성된 의회) 소집을 요청했다.

루이 16세가 무력으로 탄압하자 1789년 7월 14일 파리시민이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혁명이 시작된다.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요청하고, 우여곡절 끝에

왕이 처형되면서 프랑스에서도 의회가 주권을 잡은 ‘국민국가’가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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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 번 "대서양에서 시작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서

"국민국가"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보았습니다.


미국의 독립전쟁의 시작은 보스턴항에서 차를 바다에 투척한 조그만 사건으로

비롯이 되었지만, 그 바탕에는 영국 정부의 과도한 세금징수에 대한 반발과

영국인에 비해 식민지 국민으로서의 차별대우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이 영국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 독립군을 지원

해 준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프랑스는 이로 인해 재정의 부담을 가지게

되었고, 흉년까지 겹쳐 왕정이 무너지고 시민혁명이 발생하게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겪게 됩니다.


미국은 독립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식민지에는 독자적인 왕이 없으니 이제까지의

왕이 주권을 가진 나라가 아닌 새로운 국가의 모델과 정당성 확보가 필수적

이었고, 이를 존 로크의 "사회계약설"을 통해 만족시키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거나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프랑스혁명이 먼저 일어

나고 후에 미국 독립전쟁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인데, 미국의 독립전쟁이

프랑스의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시대의 흐름, 역사의 흐름은 피할 수가 없는 법이어서, 이러한 국민국가의 모델은

점차 전세계로 퍼지게 되지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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