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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Nov 01. 2017

<19세기 후반, 영국과 독일의 패권다툼>

“처음부터 다시 읽는 친절한 세계사”中

<19세기 후반, 영국과 독일의 패권다툼>


--“처음부터 다시 읽는 친절한 세계사”中 (3)


                                  강 일 송


오늘은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의 저자가 쓴 “처음부터 다시 읽는

세계사” 세 번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19세기 영원히 질 것 같지 않았던 대영제국은 19세기 말이 되자 그 세력이 약화되면서

후발주자인 독일과 미국에 그 자리를 서서히 내어주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그 교체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자인 미야자키 마사카츠(1942~)는 도쿄교육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후 도립미타고등학교,

도립구단고등학교, 쓰쿠바 대학 부속 고등학교 등의 교사, 홋카이도교육대학 교수를 거쳐

강사와 저술가로 활동중입니다.


저서로는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1,2”, “하룻밤에 읽는 중국사”, “술의 세계사”, “이슬람

네트워크”, “해도의 세계사”등 다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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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몰락과 독일의 대두


19세기 말 유럽에서는 경제 활동을 정치 및 군사 활동으로 다시 짜는 침략적인 ‘제국주의’

경향이 강해졌다. 그 배후에는 경제 질서의 변화와 경쟁 격화가 있었다.


19세기 후반의 기술혁신과 새로운 경제 시스템의 등장, 보호무역의 대두로 ‘팍스 브리태니카’

라 불렸던 영국의 절대적 우위가 붕괴되었다. 많은 투자를 필요로 하는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높아졌는데, 이에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이 자본을 제공하는 영국식 경영은 시대에 뒤처진

것이 되었다. 은행과 증권회사가 자본 조달을 하고 관료적 조직의 기업에 의한 시대로 바뀐

것이다.


독일, 미국 등의 신흥공업국은 저렴한 노동력과 신기술, 새로운 경영방식을 무기로 영국을

뒤쫓았다. 1860년대에 3.6%였던 영국의 경제성장률은 1870년대에 2.1%, 1880년 1.6%로

하락 일변도를 달렸고, 반면 1870년대부터 1914년까지 독일과 미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약 5%였다.


공업의 경쟁력이 약해진 영국은 그때까지 축적해온 풍부한 자금과 해상운임, 보험료 수입,

대외투자 이익 등을 이용하여 값싼 노동력과 자원이 풍부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미국,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 등의 광대한 식민지 및 세력권에 자본을 수출하는 금융대국

으로서의 생존을 꾀했다. 1914년 당시의 세계 해외주식투자의 43%를 영국 혼자서

보유했다는 것만 봐도 영국이 얼마나 부유했는지 알 수 있다.


★ 격화되는 영국과 독일의 바다 패권 다툼


19세기 말 독일은 영국을 제치고 유럽 제1의 공업국이 되었다.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될 당시의 국부는 프랑스와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1914년에는 1.7배에 달했다.

독일에서는 열강 독일에 대한 적대심을 능수능란한 외교로 피해온 재상 비스마르크

(1815-1898)를 밀어내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빌헬름 2세가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빌헬름 2세는 태도를 바꿔 도전적인 세계정책을 내놓았다.


그는 미국의 전략가 알프레드 마한의 “국부는 해상권력의 강화에서 나온다.”는 설에

의거하여 ‘신항로’정책이라는 적극적인 해양확장 정책을 전개했다.

“독일 제국의 장래는 해상에 있다.”는 유명한 연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빌헬름 2세는

해양 제국 영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빌헬름 2세는 1898년에 직접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을 방문하여 무료로 바그다드 철도

(터키의 코냐-바그다드-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철도)를 부설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영국의 세력권을 중심으로 한 인도양에 진출하려는 전략을 명확히 드러냈다.

이것이 바로 베를린에서 이스탄불을 경유하여 바그다드로 진출하고, 나아가 바스라 항에서

페르시아 만과 인도양으로 나아가는 3B정책이다.


독일과 영국은 ‘삼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와 ‘삼국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을

조직하여 서로 충돌했고, 이 대립관계를 제1차 세계대전까지 끌고 갔다.


1867년 독일 지멘스(1816-1892)의 발전기 발명으로 증기기관을 대신하는 ‘새로운 동력원’

으로서 전력이 등장했고, 1882년에는 세계 최초의 발전소가 뉴욕에서 가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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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계사 이야기 3번 째로, 전 세계에 걸쳐있는 식민지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영국이 어떻게 서서히 독일과 미국에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되는지

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흥망성쇠가 있음이 당연한데, 스페인을 무너뜨리고 해양제국으

로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던 영국도 이러한 세상의 이치에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독일과 미국 등의 신흥공업국은 중화학공업에 치중하여 발전을 거듭하는데, 이는

영국처럼 몇몇 거부들의 투자에 의존한 시스템이 아닌, 은행과 증권회사가 자본을

제공하고 관료조직 같은 시스템을 갖춘 기업들에 의한 것이었다 합니다.


19세기 후반이 되자 영국의 경제성장률은 1%대로 내려온 반면, 독일과 미국은

5%대의 고공성장을 계속 합니다.

비스마르크의 뒤를 이은 빌헬름 2세는 영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해양국가로

발돋움하는데 총력을 기울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그 이전부터도 있어왔지요.  그리스에서 결국 로마로 지중해의

패권이 넘어가고, 그 사이에 카르타고와의 라이벌 결전이 있었습니다.

해가 지지 않을 것 같던 로마도 그 영화는 간데 없이 게르만족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 흐름에서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하고

현재 복잡하게 전개되는 국제정세 속에서도 우리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멀리 내다보는 지혜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현재 최강국인 미국, 그리고 중국, 러시아, 일본 등도 결국 다음 세대에는 지금과

같은 영화를 누리지 못할 것임은 역사를 통해 반추해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의 역사에 우리가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는

현재 우리가 얼마나 현명하게 이 위기를 극복하느냐와 과거의 역사의 가르침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냐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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