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헌 서재 Oct 24. 2017

<빵의 역사>

"역사학자 정기문의 식사" 중 (2)

<빵의 역사>


  -- "역사학자 정기문의 식사" 중 (2)


                                 강 일 송


오늘은 음식을 통한 인류역사의 변화와 음식이 문화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고, 그 두 번째 시간으로 인류의 문명에 있어서 “빵”의 유래와 그 역사,

인류에게 끼친 영향 등을 보겠습니다.


저자인 정기문교수는 서울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서양사학과에서 로마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현재 군산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많은 책들을 저술했습니다.


“역사보다 재미있는 것은 없다.”, “한국인을 위한 서양

사”, “역사를 알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내 딸들을 위한 여성사”, “역사란 무엇인가” 등

여러 책들이 있습니다.


한번 보실까요?


=========================================================


★ 밥과 빵으로 구분되는 동서양


신석기 혁명 이후 서양인은 ‘빵을 먹는 사람’으로, 동양인은 ‘밥을 먹는 사람’으로 변천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세계의 언어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가족을 동양인은 식구(食口), 즉

밥을 함께 먹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데 반해, 서양인은 ‘빵을 같이 먹는 사람’이라는 뜻의

컴패니언(companion)이라고 부른다.


서양문명의 출발지인 메소포타미아에서 주요 작물은 보리와 밀이었고, 서양인들은 이 작물

들을 가루로 만든 후에 빵을 만들어 먹었다.

반면에 동양 문명의 중심지인 중국에서 초기 주요 작물은 기장과 조였다. 기장과 조는 가루

를 내어 쪄서 먹기도 했지만 대개는 죽을 쑤어 먹었다. 그러다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무렵 밀 재배가 확산되었는데, 서양인과 달리 중국인은 국수나, 만두를 만들어 먹었다.

그나마 밀은 머지않아 쌀에게 주요 작물의 위치를 물려주게 된다.


★ 서양에 풍차가 많은 이유


서양의 거의 모든 마을에는 풍차가 있었다. 특히 16-18세기 유럽에 20만 개 이상이 있었다

고 하는데, 이는 서양의 주곡이 밀이었기 때문이다. 동양의 주곡인 벼는 수확한 후 껍질을

벗긴 다음 쪄서 먹으면 된다. 그런데 밀은 쪄서 밥해 먹을 수 없다. 통밀밥은 찰기가 없고

맛도 없다. 더욱이 소화 흡수율이 낮아 영양 면에서도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신석기 이후

사람들이 밀밥을 먹지 않는 이유다.


그런데 밀은 다른 장점이 있다. 쌀보다 쉽게 가루로 만들 수 있고, 가루로 만든 다음

물을 섞으면 점성이 강해서 잘 붙으며, 소금이나 설탕을 비롯한 재료를 잘 흡수한다.

그런데 밀을 가루로 만드는 일은 매우 고단했다. 주로 여자들이 힘들게 작업했는데

풍차로 이 작업을 하면서 고단한 일에서 농민들이 해방되었다.


★ 최초의 빵은 호떡?


기원전 1만 년 전에 신석기 혁명으로 곡물을 재배하기 시작했지만, 그보다 이전에도

야생 곡물을 채집하여 가공해 먹었다. 기원전 2만 3000년과 2만 1000년 전의 유적인

피렌체의 빌라치노 유적과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부근의 오할로2. 유적에서 곡물을

가는 갈돌과 보리, 밀, 귀리가 끼어서 발견이 되었다.


인간은 곡식을 수확한 그대로 먹을 수 없다. 치아와 위장이 약하기 때문에 소화가 잘

되는 형태로 가공해서 먹어야 한다. 대표적인 가공법이 “찌거나, 굽거나, 발효” 시키는

것이다. 밀가루는 물을 넣고 반죽하면 밀가루 속 단백질이 부풀어 결합하여 글루텐을

형성한다. 보리는 글루텐을 형성하지 않기 때문에 초기에는 죽을 쒀서 먹었을 것이고

빵으로 만든다 해도 현재의 호떡이나 떡과 비슷한 형태였을 것이다.


★ 발효된 최초의 빵의 등장


일반적으로 빵은 곡물 가루를 반죽으로 만든 후 이스트를 넣거나 상당 시간 그대로 두어

발효시켜 부풀린 다음 굽거나 찌거나 튀긴 것을 말한다. 이렇게 빵을 정의한다면 최초의

빵은 기원전 4000년 경 이집트에서 만들어졌다.


발효는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밀가루 반죽을 자연 상태로 두어 공기 중의

유산균을 착종시키거나, 유산균을 잘 흡수하는 과일, 채소 등을 자연 발효시켜 밀가루

반죽에 넣는 방식이다. 이후에는 발효된 빵의 일부를 남겨 다음 빵을 만들 때 사용한다.

이렇게 발효한 방식이 사워 도우(sour dough)발효법이다.


두 번째는 자낭균류에 속하는 효모 배양물을 첨가하는 방식이다. 곰팡이 중에 당분이

많은 꽃의 꿀샘, 과일 껍질 등에서 자라는 것이 있는데, 고대 이집트인이 이 곰팡이를

채취하여 밀가루 반죽에 넣었더니, 반죽이 부드러워지고 수분이 촉촉이 유지되었다.

이것을 구웠더니 반죽이 부풀어 올라 부드러운 빵이 되었다.

고대 이집트인이 발견한 이 곰팡이가 효모다.


★ 문명의 상징 - 빵


기원전 6000년경 수메르 지역에 인류 최초의 도시, 우루크가 세워졌다. 이 도시의 토양

에는 대홍수 이후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소금기가 있었다. 소금기가 있는 땅에서는

밀보다 보리가 잘 자랐다. 우루크 지역의 농부들은 보리를 재배했고, 따라서 보리는

인류가 최초로 재배한 작물이다. 수메르인은 많은 보리를 수확했고, 덕분에 문명이 탄생

했다. 문명은 도시, 건축물, 기록물, 수준 있는 도구들을 만들어내는 힘과 기술을 의미

한다.


그런데 우루크 사람들은 빵을 먹는 것을 야만과 문명을 나누는 기준으로 생각했다. 이 시절

빵은 왕이나 귀족이 먹는 ‘고급 음식’이었다. 1세기 이후 로마에서도 빵은 로마인과

야만인인 게르만인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고 이러한 의식은 중세까지 내려온다.


★ 신분에 따른 빵의 차이


중세 빵 문화의 특징은 신분계급에 따라 빵의 성질이 확연히 다른데 첫 번째는 “빵의 색깔”

이다. 주로 배젖으로 구성된 하얀색 가루를 여러 번 고운 천에 거르면 얻을 수 있는데, 이는

노동력이 많이 들기에 비쌌다. 따라서 상류층은 하얀 빵을 먹고, 하층민들은 갈색 혹은

흑색 빵을 먹었다. 이런 빵들은 주재료가 호밀, 귀리, 보리, 기장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차이는 “빵의 단단함”이었다. 부자들의 빵은 하얀 밀로 만들어서 한없이 부드러운

반면, 하층민의 빵은 단단했다. 호밀, 완두콩, 귀리, 도토리, 밤 등으로 빵을 만들었기 때문

이다. 이런 재료들은 효모를 넣어도 잘 부풀지 않는다.


★ 빵이 서양문명에 미친 영향


유럽인이 빵을 주식으로 선택한 것은 기본적으로 유럽이 기후와 토양 조건상 쌀 재배가 힘든

반면 조, 밀, 보리, 호밀과 같은 밭작물이 잘 자라기 때문이다.

세계 3대 작물의 생산량을 보면 2016년 기준으로 옥수수의 생산량이 약 10.6억 톤, 밀은

약 7.5억 톤, 쌀은 약 4.8억 톤이다. 옥수수는 가장 많이 생산되지만 식용보다는 사료용과

연료용으로 더 많이 쓰인다. 따라서 인간이 가장 많이 먹는 곡물은 밀이다.


밀은 쌀보다는 소화 흡수가 잘 안 된다. 또한 밀가루의 주성빈인 글루텐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간편성, 보관성, 휴대성 면에서는 밀이 쌀보다 우수

하다. 빵은 물이 조금 들어가고 조리 시간이 짧다. 따라서 오지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다.

빵은 보관기간도 쌀보다 길다.


빵의 이러한 특성은 서양인들의 기동성을 증가시켰고, 이러한 차이가 쌓여서 두 문명의 차이

가 났다는 분석도 있다. 빵을 주식으로 삼은 덕분에 서양인은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지중해를 넘어 멀리 여행하고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만일 서양인이 밥을 먹었다면

그런 항해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물론 명나라 정화가 아프리카 동쪽까지 갔지만 그는

늘 육지를 끼고 연안 항해를 했기 때문에 한 번에 몇 달씩 쉬지 않고 가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빵이 서양인의 이동, 여행, 전쟁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


오늘은 인류문명의 역사를 서양의 주식인 빵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동양이 쌀문화가 발전하고, 서양이 빵문화가 발전한 것은 결국 강수량의 차이,

토질의 차이 등에 의해서였습니다.  유럽은 강수량이 적어 우물도 아무데서나 팔

수가 없었고,  석회질이 포함된 물은 그 순도도 낮아서 차를 많이 마시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신석기 이후 농경이 시작되고 이집트인들이 발효된 빵을 먹기 시작한 후 빵은

문명의 상징, 문명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또한 상층 귀족이나 왕족은 부드럽고

하얀 빵을 먹을 수 있었지만, 하층 계급민들은 색이 진하거나 딱딱한 빵밖에

먹을 수 없었습니다.


가족의 개념을 동양에서는 밥을 함께 먹는 사람 즉, 식구(食口)라고 부르는 데

반해, 서양인은 ‘빵을 같이 먹는 사람’이라는 뜻의 컴패니언(companion)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흥미롭지요.


또한 빵이 밥보다 간편성, 휴대성, 보관성이 뛰어나서 장기 대항해에 유리한

점을 제공하여 서양인들이 신대륙을 찾아 식민지를 확보하였다는 내용도

아주 신선한 시각입니다.


오늘 보리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로 재배된 이유, 빵이 무발효 빵이었다가

이집트에서 시작된 발효빵으로 훨씬 부드러워지고 맛있어졌다는 내용,

서양이 풍차가 많았던 이유, 밀과 벼의 성질의 차이로 동서양 문화가 달라진

내용, 등등,   상당히 다양하고 재미가 있는 지식을 많이 얻은 책이었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품위 있는 삶을 만드는 선택의 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