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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Dec 27. 2017

<라틴어 수업>

<라틴어 수업>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강 일 송


오늘은 유럽 언어의 모태인 라틴어를 주제로 서강대학교에서 강의가 된 내용을 책으로

엮은 베스트셀러 한 권을 보려고 합니다.

5년간 강의가 되면서 서강대생은 물론 많은 다른 대학교 학생들, 일반인들도 청강을 하였

다는 명강의를 정리한 책입니다.


저자는 한동일(47) 교수이자 신부인데, 그는 한국인 최초,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냐 변호사이고, 2001년 로마 유학길에 올라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교회법학으로 석박사를 하였습니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법학과와 법무대학원

에서 ‘유럽법의 기원’에 대해 강의하고 있으며 “카르페 라틴어 종합편”, “유럽법의 기원”,

“교회의 재산법”, “그래도 꿈꿀 권리” 등을 저술했습니다.


그의 명강의 중 몇 가지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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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어의 뿌리 인도 유럽어


오늘도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서구어의 부정 부사인 ‘no, non, ne, nein’등의 부정

부사는 고대 인도 유럽어의 ‘부정,不定’을 뜻하는 개념, ‘밤에 흐르는 물의 모호함’에서

나왔습니다. 고대에는 깜깜한 밤을 밝은 바다의 움직임이 끝나고 어두운 바닷물이 땅으로

흘러와 생기는 현상으로 이해했어요. 그래서 고대인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뭘 봤니?”라고 물으면 “물,na”만 보았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만 보았다.”는 대답은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도 유럽어의 물을 상징하는 ‘나,na’라는 음소에서 ‘아니다’라는 부정부사

‘no,non’이 유래한 겁니다.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도 ‘아니’라는 부정은 인도 유럽어처럼

밤에 흐르는 물을 상징하는 표시 ‘^^^^^’로 나타냈고, 이후 산스크리트어의 부정부사 ‘na’가

그리스어 ‘ne’가 되고, 라틴터로 ‘ne,non’이라는 부정부사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유럽어의 모언어로 알고 있는 라틴어는 세계 언어 분포상 인도 유럽어계,

Linguae Indo-europeae에 속합니다.


그러면 “인도 유럽어”는 무엇일까요? 인도 유럽어는 북인도, 근동, 유럽 전 지역에 전파되어

있는 언어군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현재는 산스크리트어, 히타이트어, 그리스어, 라틴어,

켈트어, 고대 게르만어 등을 비교 연구하여 상고 인도 유럽어를 어휘별로 복원하는 데 성공해

사전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고대에 인도와 유럽지역은 유라시아 스텝 지역에서 유입된 유목민족에게 정복

당했는데요, 언어도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서구사회에서 시작된 ‘법’이라는 용어도

그 어원은 종교적인 것에 기초를 두고 있고, 그 원천은 우리가 흔히 죽은 언어라고 생각

하는 산스크리트어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산스크리트어의 영향은 인도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만 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쪽으로

우리나라의 언어에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가령 ‘엄마’라는 말을 분석해보면

거의 모든 언어의 엄마를 뜻하는 단어에는 ‘마,Ma’의 음가가 들어갑니다.

영어의 ‘마더,mother’, 프랑스어의 ‘마망, maman’, 스페인어의 ‘마마,mama’,

일본어의 ‘마마,’, 중국어의 ‘마마,媽媽’ 등만 봐도 그렇죠.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고대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한계와 척도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인도 유럽어는 자음 Ma 음가를 선택했습니다. ‘M’이라는 음가에서

물질,척도 measure 라는 용어가 나왔고, ‘인간 생명의 자연적 범주와 관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엄마’라는 말이 파생됐죠. 산스크리트어의 ‘마트르’, 그리스어의 ‘마테르’, 라틴어의

‘마테르’라는 말은 모두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는 비단 언어 영역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닙니다. 로마 유학 중 법

철학 수업을 가르친 다고스티노 교수님은 피타고라스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철학’이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그 배경을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을 무엇이라 부르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철학자’, 다시 말해

‘지혜를 구하는 사람’ 혹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현자’라고 자처하는 것은 극히 불손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유럽 문화의

출발이 그리스,로마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특히 기원전 6세기 철학자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플라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고, 플라톤의 사상은 스토아 철학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어요. 그런데 피타고라스의 사상 역시 이집트와 페르시아를 통해 전해진 인도 사상

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 인생을 위해서 배우고 배워서 남을 주자


우선 ‘언어를 공부하는 것’에 대해 말하려고 하려면 ‘언어는 공부가 아니다’라는 역설적인

명제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언어라는 것이 다른 학문들처럼 분석적인 공부법으로

학습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꾸준한 습관을 통해 익힐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언어의 성질은 모국어를 뜻하는 영어 단어가 ‘마더 텅,mothre tongue’

이라는 점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언어는 공부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언어의 습득적, 역사적 성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 주의 깊게 봐야 할 이유는 ‘언어의 목적’ 때문입니다. 언어는 그 자체의 학습이 목적

이기보다는 하나의 도구로서의 목적이 강합니다.


우리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외국어 영역의 지문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외국인들조차

그 지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지요. 독해력을 평가할 목적이라면 차라리

잘 쓰인 역사, 철학, 문학, 예술 등의 고전을 읽히고 가르치는 편이 훨씬 가치있을 겁니다.


언어학습의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학습의 방향성에도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 즉 ‘어떤 것을 아는 것’ 그 자체가 학문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앎의 창으로 인간과 삶을 바라보며 좀 더

나은 관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제는 정말 공부해서 남을 줘야 할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시간을 들여 공부를 한

머리만 있고 따뜻한 가슴이 없기 때문에 그 공부가 무기가 아니라 흉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꿈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한 사람의 포부는

좀 더 크고 넓은 차원의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기 보다는, 더 많은 사람, 더

넓은 세계의 행복을 위해 자기 능력이 쓰일 수 있도록 하겠다는, 한 차원 높은 가치를 추구

했으면 좋겠습니다.


‘배워서 남 주는’ 고귀한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성인이 아닐까요?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인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을 나누고 실천할 줄 모르면 지성인

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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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인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이자 가톨릭 사제인 저자의 라틴어에 관한

강의를 함께 들어보았습니다.


본래 의학용어도 라틴어를 기반으로 한 경우가 많아 의과대학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도 학생 때 라틴어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비단 의학용어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유럽어의 뿌리인 라틴어는 서양문화의 기반이

되고 있지요.


하지만 오늘 저자는 이러한 라틴어도 인도 유럽어계에 속하고 철학용어, 법률용어 등에도

이러한 바탕이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부정 부사인 ‘no, non, ne, nein’등이 ‘밤에 흐르는

모호한 물’이라는 개념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물만 보았다.”가 “아무것도

못 보았다.”는 것을 말하니 말이지요.

또한 엄마를 뜻하는 세계의 다양한 언어들이 “마”라는 음가가 들어가고, 이것을 한계와 척도

의 음가로 “마,Ma”에서 비롯되었다는 내용도 새롭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엄마를 부르는 “Ma”가 아기들이 가장 쉽게 부를 수 있고, 편하게

발음이 되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여도 엄마를 “마,Ma”라고 부르는 현상을

나타내지 않은가 하고, 이러한 접근법도 하나의 의미있는 해석이 될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두 번째 내용에서는 “언어는 공부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말하고 있는데, 굉장히 합리적인

말이라 생각합니다. 언어를 분석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실제 일상에서 꾸준히 습관적

으로 사용함으로써 익힐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팩트이지요.


공부만 열심히 하여 지식만 가득 채운 “지식인”이 되지 말고, 그 지식으로 실제 사회와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 행동을 하는 “지성인”이 되라는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스스로 공부하여 익힌 지식을 나 혼자만이 아닌 못 배운 사람과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배워서 남주는” 가치있는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배움"과 진정한 "앎"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하루가 되고자

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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