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과 직관으로 헤아린 마음의 낱말들”
<마음 사전>
“감성과 직관으로 헤아린 마음의 낱말들”
강 일 송
오늘은 시인이기도 한 저자가 삶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낱말들을 스스로의 마음이라는
필터를 통해 걸러낸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김소연(1967~)시인은 경주에서 태어나 서울 망원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합니다.
스스로 게으르고 꼼꼼한 성격이라고 말하는 그는, 그 게으름과 꼼꼼함 덕분에 시집을
낼 수 있었다고 하네요.
첫 시집 <극에 달하다>를 내고,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을 펴냈습니다. 산문집으로 <시옷의 세계>, <한 글자 사전> 등이
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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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벼움
뜨거운 열은 물체를 날게 한다. 그래서 기구는 뜨거워지자마자 가벼운 공기를
품고 하늘을 난다. 기구가 하늘을 날듯이 우리도 뜨거움 덕분에 날 수 있다.
너무 높이 날지는 말자고 모래주머니를 달고서, 더 높이 날아오르고 싶을 때에
모래주머니를 하나씩 떨어뜨리며.
★ 행복 기쁨
행복은 스며들지만, 기쁨은 달려든다. 행복은 자잘한 알갱이들로 차곡차곡 채워진
상태이지만, 기쁨은 커다란 알갱이들로 후두둑 채워진 상태다.
기쁨은 전염성이 강하지만, 행복은 전염되기 힘들다. 남의 기쁨에는 쉽게 동조되지만,
남의 행복에는 그렇지가 않다. 약간의 질투와 약간의 모호성, 그것이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남에게서 전염된 기쁨은 그러나 오래가지도 않고 자기 것이 되지도
않는다. 금세 잊는다.
그렇지만 남에게서 전염된 행복은 오래가기도 하거니와 자기 것이 된다.
그만큼 느리고 꼼꼼하게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얻은 기쁨과 행복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그렇지만, 빠르고 간단한 것들은 느리고 꼼꼼한 것만 못하다.
★ 소망 희망
소망은 지니고 태어나고, 희망은 살면서 지니게 된다. 소망도 희망도 우리의 힘만으론
이루기 어렵다. 희망은 행운이 필요하고 소망은 신의 가호가 필요하다.
때로 소망은 조금씩 옷을 젖게 하는 가랑비처럼 소리 없이 우리 곁에 와
있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은 이루어냈다는 자각이 크지 못하다.
다만, 다른 소망을 품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예전의 소망이 벌써 이루어져
있음을 알아챈다.
그에 비하면 희망은 이루어졌을 때의 자각이 분명할뿐더러 희열을 가져오기도
한다. 희열이 가라앉은 후, 내내 품어왔던 희망을 이루고 난 후, 이제는 어떤
희망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모른다. 희망은 그래서 독한 허무를 자식처럼
품고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 평안하다, 편안하다
우리는 편안함을 좋아한다. 편안한 사람, 편안한 공간, 편안한 시간...
편안하다는 것은 편리하고 안전하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손 끝에 있고 모든
것이 입안의 혀와 같다. 그리하여 어떤 욕구도 없이 이완되어 있다.
평안하다는 것은 평화롭고 안정적이란 뜻이다. 평화도 안정도 태풍의 핵처럼
정지되어 있으나,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만한 긴장감이 필요하다.
그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우리 몸은, 평안한 상태에서는 조금의 의욕을 남겨놓고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할 줄 안다. 조금의 의욕과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한
평안함은, 스스로가 속해 있는 관계와 장소, 시간 따위를 잘 영위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노력을 기울인다.
나의 편안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대가로 치르지만, 나의 평안함은 누군가와
함께 누리는 공동의 가치가 될 수 있다.
★ 은은하다 은근하다
은은한 것들은 향기가 있고, 은근한 것들은 힘이 있다. 은은함에는 아련함이 있고
은근함에는 아둔함이 있다. 은은한 것들이 지닌 아련함은 그 과정을 음미하게 하며,
은근한 것들이 지닌 아둔함은 그 결론을 신뢰하게 한다.
은은한 사람은 과정을 아름답게 엮어가며, 은근한 사람은 결론을 아름답게 맺는다.
★ 이해와 오해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
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사실과 진실
사실이 온전하게 존재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사실은 언제나 사실과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서 편집되고 만들어진다. 편집되고 만들어진다는 것은 이미
사실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가끔 객관적인 판단을 하고 싶어서 객관화된 사실에
집착하곤 한다. 사실이라는 것을 추적하는 과정에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은 진실보다 더 애매하다. 사실에는 진실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진실은 언제나 매복해 있다. 매복해 있기 때문에 불쑥불쑥 드러나며, 드러나지 않을
때도 많다. 진실은 켜켜이 쌓인 것들을 풀어 헤쳤을 때에 오히려 산만해진다.
진실은 언제나 덩어리째 존재해야만 형상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사실은 낱낱이 분석할수록 명징해지는 측면이 있지만, 진실은 분석하고 나면
형체가 흐트러지고 종합했을 때에 오히려 명징해지는 속성이 있다.
★ 그럼에도...
더 이상 잡을 것이 없을 때에 우리는 인류가 만든 새빨간 거짓말과 지겨운 함정에도
기꺼이 투항한다. 오해마저도 고맙고, 거짓말마저 달콤하며, 함정마저도 즐거운
나의 집과 같이 칭송되는 지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해나 사랑, 신앙이나 도덕, 헌신 같은 것들은 눈물겹게
인간적이다. 너무나 인간적이기 때문에 되레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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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들을 깊은 사색을 통해 저자의 언어로 되살아난 낱말들을
함께 보았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스스로를 소개한대로 꼼꼼한 사람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어떤 개념을 이해할 때 저자는 이를 깊이 들어가서 파헤치고
뒤틀어 보고, 뒤집어 본 후 자신만의 언어로 재탄생시켜 들려줍니다.
가벼움이란 주제에서도 물리학적으로 뜨거운 기체는 위로 올라가는 것이 맞는데
시인인 저자는 사람도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올라가고 뭔가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행복과 기쁨에서도 그 미묘한 차이를 절묘하게 설명하는데, 기쁨은 쉽게 전염이
되지만 행복은 어렵게 전파가 되고, 빨리 된 것은 빨리 식고 천천히 된 것은 오래
간다고 간파합니다.
소망과 희망의 차이에서도 소망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져 곁에 있는 것을 알게
되지만 희망은 이루어졌을 때 급격한 기쁨을 동반하지만 또한 독한 허무도 자식처럼
품고 따라 온다고 말합니다. ‘독한 허무를 자식처럼 품다’, 역시 시인다운 표현입니다.
편안함과 평안함도 시인은 깊은 사색 후에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나의 편안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대가로 치르지만, 나의 평안함은 누군가와
함께 누리는 공동의 가치가 될 수 있다.’ 라는 멋진 말로 단숨에 정리합니다.
은은함과 은근함에서도, 은은함은 향기가 있고 아련함이 있으며 과정을 아름답게
만들고, 은근함은 힘이 있고 아둔함이 있으며 결론을 아름답게 만든다 합니다.
이해와 오해의 차이도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통찰을 보여주지요.
사실과 진실의 설명은 상당히 철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데, 사실이 온전하게 존재하는
곳은 없고, 사실은 편집되고 만들어질 수 있다는 설명은 아주 날카롭습니다.
사실은 파고들고 풀어헤칠수록 선명해지지만 진실은 약간 거리를 두고 덩어리째
크게 보아야 형체가 분명해진다고 하지요.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라는 글에서 인간은 사실과 진실이 아닌 것에도 가끔은 투항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미완성적, 불완전성이 드러난 행위가 가장 인간적이고
인간적이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완벽할 수도 없고,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인간이
완전하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닐 것입니다.
이 말에 부족하고 미숙한 저는 위안이 많이 되는데 여러분도 그러하신지요?
편안하고, 평안함을 함께 지닌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