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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Apr 18. 2018

<중세에서 근대의 별을 본 사람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1)”

<중세에서 근대의 별을 본 사람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1)” <2> 中


                                     강 일 송


오늘은 우리 시대 탁월한 역사학자인 서울대학교 주경철교수의 책 한 권을 함께 보려고

합니다. 그는 근대의 시작부터 대항해 시대를 거쳐 현대까지의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해와 ‘근대를 읽는 역사 스토리텔러’라고도 불린다 합니다.


주경철(1960~) 교수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와 같은 대학원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후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소장과

르네상스 연구소 소장, 도시사학회 회장을 지냈습니다.


저서로는 <대항해 시대>, <문명과 바다>, <문화로 읽는 세계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히스토리아>, <모험과 교류의 문명사> 등등 많은 작품이 있습니다.


근대를 연 인물 중 전에 콜럼버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오늘은 헨리 8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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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8세, 근대 영국을 출범시키다.


18세에 잉글랜드의 왕위를 차지했을 때 헨리 8세(재위 1509-1547)는 매력적이고 지적이고

세련된 젊은 국왕이었다. 그러던 그가 점차 비대하고 못생긴 데다가 악의 가득한 늙은이로

변모했고, 부인들을 차례로 죽이거나 내쫓는 동화 속 ‘푸른 수염’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는 평생 985명을 사형에 처했는데, 그 가운데에 왕비 두 명, 추기경 한 명, 대법관 한 명,

공작 12명, 남작 18명, 수도원장 77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가공할 폭력을 통해 그는 절대주의 체제를 이루어갔고 국제적으로는 프랑스와 신성

로마제국 간 중재자 역할을 했으며, 영국 국교회를 만들어냈다. 무지막지한 폭군이 근대

영국사를 주조한 것이다.


헨리 8세는 1491년 그리니치에서 선왕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헨리 7세는

튜더 왕조를 개창하여 영국 근대사를 연 인물이다. 헨리 7세는 국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병 집단을 금지시키고 귀족들의 힘을 통제하여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고, 이를 헨리 8세

는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원래 헨리에게는 아서라는 형이 있었고, 아서는 에스파냐의 공주 캐서린과 결혼을 했었다.

하지만 열병으로 아서가 죽자 열 살의 헨리가 왕세자가 되고 형수님까지 물려받게 되었다.

잉글랜드 왕실과 에스파냐 왕실은 상호 군사 동맹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아이들의 결혼을

추진하였었던 것이다. 헨리 7세는 부왕이 죽자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캐서린과 결혼을 선언했다.


국왕이 된 다음 우선적으로 신경 쓸 일 중 하나는 후계자 문제다. 캐서린은 첫 번째 딸을

사산한 후 아들을 낳았으나 생후 몇 주 만에 죽었다. 그 후 두 번을 연거푸 아들을 사산

하더니 1516년에 딸 메리를 낳았다. 이 딸은 후일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재위하는 동안

자신과 종교가 다른 개신교도들을 무수히 죽여서 블러디 메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동안 헨리는 여러 여인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그중 한 명인 엘리자베스 블라운트

가 1519년에 아들을 낳았다. 헨리 피츠로이라는 이 아이는 리치먼드 공작이 되었다.

1528년부터 헨리는 캐서린과의 이혼을 고려하고 있었다. 앤 불린이라는 다른 여인과

혼인을 하고 싶었지만 가톨릭 교리상 이혼은 불가능했고 캐서린도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헨리는 자신의 말이 곧 법이 되는 일에 익숙했다. 1534년에 수장령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는데, 이로서 국왕은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이 되었으니, 이제 자기

문제도 자기가 정하면 그만이었다.

캐서린을 궁에서 내쫓은 다음 앤 불린에게 왕비의 방을 주었다. 1532년 국왕과 앤

불린은 비밀 결혼식을 올렸고, 이제 남은 건 앤 불린이 아들을 낳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앤 불린이 낳은 아이는 딸이었다. 이 아이가 후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된다. 하지만 이런 앤 불린도 결국 아들을 낳는데 실패하고 간통죄, 대역죄를 뒤집어

쓰고 죽게 되며, 총 6명의 왕비 중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만 왕보다 더 오래 살아

남는 데 성공을 한다.


영국은 국왕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처형 과정에서 종교가 바뀌고 정치와 외교가 급변했다.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되어 교회의 재정, 인사, 행정에 제한 없이 관여할 수 있게 되었고

조그마한 의문 제기도 허용되지 않았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은 루이 14세보다도 헨리 8세에게 더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엄청난 폭력을 통해 평화를 지켰는데 이는 실로 큰 모순이다. 결과적으로 헨리 8세

의 노력 덕분에 잉글랜드는 침략과 종교전쟁을 피할 수 있었고, 유럽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국으로서 기껏해야 양이나 쳐서 양모를 대륙에 파는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의 중심국가로 떠오르게 되었다.


잉글랜드가 그 찬란한 발전의 도상에 이르게 한 선구자가 폭군이자 편집증 환자이자

호색한인 헨리 8세라는 것을 본다면, 역사의 발전은 반드시 선한 인물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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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굉장히 흥미로운 저작들로 우리에게 영감을 주어온 서양사학자 주경철

교수의 책을 함께 보았습니다.

중세에서 근대를 이끌어낸 인물 중 잉글랜드의 헨리 8세를 다루었는데, 그는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엄청난 사람들을 죽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영국은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는 기초를 다지게 됩니다.


여러 명의 왕비를 죽이면서 갈라선 로마 가톨릭과의 관계는 오히려 외부 세력

으로부터의 간섭을 막아주었고, 정치적으로 맞서는 귀족세력을 폭력적으로

억누른 탓에 안정된 정치 기반으로 후에 엘리자베스 1세가 세계를 제패하는데

터를 닦아놓았습니다.   어머니인 앤 불린이 3살이 되기도 전에 처형되는 불행을

안고 태어난 엘리자베스 1세는 아버지가 닦아 놓은 튼튼한 기반위에서 해가

지지 않는 영국 제국을 만들게 됩니다.


역사는 늘 반전을 준비하고 있고 상식을 뒤집으며 자신만의 룰로 흘러갑니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어떻게 진행할 지 모르기에 역사는 뒤돌아 보면 소설보다

더 소설같으며 예측 불가의 흥미진진함이 있습니다.


믿고보는 저자인 주경철교수의 다음 책도 곧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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