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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May 12. 2018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2>

“과학과 종교의 공존을 모색한 근대인, 갈릴레오 갈릴레이”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2>

“과학과 종교의 공존을 모색한 근대인, 갈릴레오 갈릴레이”


                                                강 일 송


오늘은 서양사학자 주경철 교수의 유럽인 이야기 두 번째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주경철(1960~) 교수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와 같은 대학원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후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소장과

르네상스 연구소 소장, 도시사학회 회장을 지냈습니다.


지난 번에는 콜럼버스와 헨리 8세에 대한 주교수의 글을 썼었고 오늘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로 유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종교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로의 변천을 함께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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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지구는 돈다.


널리 회자되는 이 이야기는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1633년 6월 22일, 로마에 있는

도미니크 교단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교회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참회자의 차림으로 무릎을 꿇고 참회문을 읽어나갔다.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는

주장을 한 죄로 종교재판소에서 이단 판정을 받은 것이다. 이후 재판정을 나오며

갈릴레오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E pur si muove.


널리 회자되는 이 이야기는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종교재판소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자가 그런 무엄한 말을 했다가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기록에 처음 나온 것은 갈릴레오가 죽고 100년도 더 지난 1757년의 일이다.


그렇다면 갈릴레오는 과학적 진리만을 믿은 인물인가. 그렇지는 않다.

갈릴레오는 독실한 신앙인이었으며 과학과 종교는 상보적인 진리의 두 측면이라고 보았다.

역사에서 이성과 신앙은 꽤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공존해왔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맞서다.


1564년 갈릴레오는 피사에서 태어났다. 이후 열 살 무렵에 피렌체로 이사를 했고

발롬브로사의 수도원에서 라틴어로 된 고전들을 공부했다. 그리고 18세에 피사대학에

들어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공부를 하였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1000년

이상 잊혔다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기독교 신앙을 구축하는 핵심 논리로 사용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왜 세상만사가 현재 우리가 보는 상태로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사물의 ‘원인’을 찾아야 하고 자연계의 모든 사건의 이면에 있는 종국적인

‘목적’을 알아야 한다. 그는 4대 원소인 흙, 공기, 물, 불과 그것들의 성질인 열기, 냉기,

습기, 건기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

사실 갈릴레오가 평생 부딪치며 싸운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체계였다.


★ 철학과 점성술이 공존하던 시대


갈릴레오는 1592년 파도바 대학의 수학교수 자리를 얻고 경제 사정이 나아졌다.

또한 베네치아 소속의 파도바는, 베네치아가 교황청과 갈등을 있어 교황청의 영향력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었고 이는 연구에 자유를 주었다.


당시 과학혁명이 일어났다고는 하지만, 천문학을 공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의사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는데, 별자리로 점을 쳐서 환자의 운명을 파악해야 치료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즉, 그 사람이 태어났을 때 행성들의 위치를 알아야 했으니까 말이다.


사실 이런 비학(秘學)적 요소가 뚜렷한 사례는 오히려 갈릴레오보다 후대 인물이며 근대

과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뉴턴(1642-1727)이었다. 합리적인 이미지의 뉴턴이지만

사실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것은 연금술과 마법 같은 신비주의 학문들이었다.

예컨대 뉴턴은 성경에 나오는 수치들을 이용해 말세를 계산하는 연구에 몰두했다.

(뉴턴의 연구에 의하면 2060년에 종말이 올 것이다.)


뉴턴의 연구를 계속한 경제학자 케인스가 말하기를 “뉴턴의 이성 시대의 최초의

인물이 아니라 마지막 점성술사였다.”라고 했다.


갈릴레오도 자신의 후원자인 토스카나 대공 페르난도 1세의 부인이 병약한 남편의 운명에

대해 물어보자 점성술에 의해 장수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로부터 딱 22일 후에 대공이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공의 아들 코시모 2세가 자신의 제자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물려받은 코시모 2세 덕에 계속 후원을 받는 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 우주를 처음 깊이 들여다 본 갈릴레오


이즈음 갈릴레오에게는 밀물과 썰물이 왜 일어나는지가 주요 관심사였다. 이에 대한

고찰을 통해 그는 점차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수용하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1543년 지동설을 설명하는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을 편찬했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은 혁명적이고 전복적이었지만 교황청 금서목록에는 오르지 않았고

교황청이 이 책을 이용해 달력을 개정했는데 바로 1586년의 고레고리우스력이다.


1604년 10월 15일, 밤하늘에 새로운 별이 나타났다. 현대의 용어로 말하면 초신성이

발견된 것인데, 이것이 학계와 종교계를 크게 흔들었다.

이 현상은 고전적인 우주 모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체는 변하지 않는 완벽한

물질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어떤 변화도 있어서는 안 된다.


갈릴레오는 여러 도시의 학자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공동 연구를 했다. 새로운 천체는

어디서 보더라도 시차가 없었다. 이 말은 곧 그 현상이 달과 같은 가까운 곳이 아니라

머나먼 우주에서 일어났다는 의미며,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의 낙하운동만이 아니라 우주의 현상에 대해서도 막연한 추론이 아닌 실제 관찰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광활하고 먼 우주 공간을 맨눈으로 본들 얼마나 관찰하겠는가.

바로 이때 등장한 결정적 도구가 망원경이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이용해 처음으로 우주의 속살을 들여다본 인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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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서양사학자인 주경철교수의 책을 통해 중세사회에서 근대 과학의 시대로

이행되어 가는 시기의 이야기를 함께 보았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로 유명한 학자이지요.

그는 그보다 앞선 세대에서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영향을 받고, 실제로 실험과 연구를 하여 인류의 천체관을 바꾸게 됩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우리의 상상과는 다르게, 종교와 과학이 별개로 움직이지 않고

상보적인 역할을 하였다합니다. 천문학과 점성술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천문학으로

의사들에게 각 개인의 운명에 대한 조언을 하였고 이를 의사들이 치료에 반영

하였다고 하니 이때의 의학도 비학(秘學)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특히 근대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뉴턴이 연금술과 마법에 심취한 학자였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서양 전체 모든 학문과 문화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교부들을 통해

기독교 신앙 교리가 뿌리내리는 철학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갈릴레오 같은 당시 과학자들은 점차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 우주관으로는

더 이상 현실의 자연을 설명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공의 낙하운동만 보아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의하면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낙하를 하여야 하지만 실제로는 떨어지는 속도는 같지요.


오늘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시대적 상황을 갈릴레오를 통해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저자인 주경철교수는 늘 우리에게 흥미로운 반전의 이야기를

들려주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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