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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시티, 인문의 도시>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中

by 해헌 서재

<메타시티, 인문의 도시>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中


강 일 송


오늘은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의 두 번째 이야기로 지난번 서울에 대한 내용에 이어

연속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자 승효상(1952~)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빈 공과대학교에서 수학을 했다합니다.

15년간의 김수근 문하를 거쳐 새로운 건축 교육을 모색하고자 ‘서울건축학교’설립에 참가

하기도 했습니다. 1998년 북런던대학교 객원교수를 지냈고, 서울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

학교에 출강하기도 했습니다.


저서로 “빈자의 미학”, “지혜의 도시”, “건축, 사유의 기호”, “지문”,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등이 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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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오랫동안 성벽 속에 형성된 계급적 공동체였다.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에서 발굴된 집단 거주지가 1만 년 전의 역사라고 하지만,

도시로서 제도적 장치를 가장 먼저 갖춘 곳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수메르인의 도시인

우르가 대표적이다.


구약성서에 아브라함의 고향으로도 나오는 이곳에는 성벽도 있고 지구라트나 왕궁, 일반

거주지도 확인되었으니 도시의 원형이라고 해도 된다. 한 지역을 성벽으로 한정하고

그 속에서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는 도시, 이는 성벽이 없어지는 18세기 무렵까지 무려

반만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줄곧 지속된 도시의 개념이었다.


성벽의 도시는 중세 유럽에서 황금기를 맞는다. 방방곡곡에서 이상도시와 유토피아를

외치며 도시가 건설되었다. 난공불락의 성벽을 쌓고 밖에 해자를 두른 이 도시들은

치밀한 가로망으로 위계적 질서를 만들고 가운데 영주의 궁을 두어 단일 중심을 이룬

폐쇄적 조직이며, 그래서 모두가 배타적이다.


이들 도시 이름 끝에 붙는 ‘-pois’, ‘-pur’, ‘-burg’, ‘-bough’, ‘-bourg’ 등이

성벽이나 닫힌 공간을 의미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성내는 성밖에서

보면 동경의 대상이요, 질시 자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란 뜻의 ‘부르주아,bourgeois’가 착취계급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18세기 말엽 프랑스 시민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으로 정신과 물질의 자유를 얻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배타적 도시의 상징이던 성벽이 마침내 허물어지고

도시는 기회의 땅이 되어 확장 일로에 놓이고 만다.

도시고 커졌고 주거, 상업, 공업 지역으로 나뉘었으며, 도로는 서열화되었고, 도심과

부도심 같은 계급도 매겨졌다. 그런 도시를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라고 불렀다.


메트로폴리스는 라틴어 ‘meter(mother)’와 ‘pois(city)’를 합친 말로 메트로가 어머니니

성장과 팽창이 본질적 목표였다. 백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이 메트로폴리스는 21세기가

시작되던 해에 무려 450개나 되었고, 그중 스물다섯여 도시는 이미 천만 명 인구의

메갈로폴리스(Megalo-)나 메가시티(Megacity)로 팽창하였다. 심지의 지구 전체의 단일

도시화를 목표로 하는 에큐메노폴리스(Ecumenopolis)라는 이름도 등장했다.

실제로 2050년에는 인류의 75%가 도시민이 된다고 한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안녕할까?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1943~)은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새로운 도시를 정의할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시노이키스모스(synoikismos), 즉 종족 혹은 경제적 이해,

정치적 견해의 차이가 함께 어울리는 것을 포함한 도시를 말했다.

단일 중심이나 위계질서가 아니라 복잡다단하며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다원적 민주주의를

2,300년 전에 그리스 철인은 그렸던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프랑수아 아셰(1946-2009)는 아예 새로운 도시 개념을 제안했다.

<도시의 미래, 메타폴리스>라는 책에서 성장과 팽창이 목적인 메트로폴리스가 아니라

지속과 연계의 가치를 지향하는 메타폴리스가 새로운 시대의 도시 풍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는 기능, 효율, 속도, 결과보다는 관계, 개념, 느림, 과정이 훨씬

중요하고 개발이나 미래보다는 재생이나 현재가 더 귀중하다.


동시다발적이며 연대적이고 개인의 자유가 우선인 곳, 지리적 한계를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로

극복하는 곳이 그가 제안한 메타폴리스이며 우리가 지금까지 지녀온 도시에 대한 개념을

뛰어넘는 도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나는 “메타시티(Metacity)'"라는 개념까지 확장해보았다.

메타시티에서는 기억과 전통을 중요시한다. 보편성은 또한 절대적 가치여서 변화와 진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살았던 터전을 깡그리 지우는 개발보다는 과거의

기억을 유지하는 재생이라는 단어가 적합하며 일시적 완성보다는 더디지만 많은 이들이

참여하여 만드는 생성과 변화의 과정이 소중하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루려 하지

않으며, 점진적이고 관찰적이어서 보다 사회적이고 인간적이다.


따라서 이 메타시티를 우리말로 옮기자면, 계급도시가 아니라 인문도시이며 물질의 도시가

아니라 성찰의 도시다. 워낙 서양도시와 태생이 다른 우리의 도시들이니, 이제는

지배나 배척을 통한 팽창의 미망에서 벗어나 관계와 공존을 통해 우리 삶을 성찰하며

회복할 때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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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 번 승효상 건축가의 2번째 이야기를 함께 보았습니다.

도시에 관한 역사부터 미래 도시의 바람직한 모델이 무엇인지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철학에 대한 내용이 충실히 담긴 글이었네요.


처음 도시의 유래부터 보았는데, 최초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등이 가장 역사적으로 처음 출현한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도

나오는 예리코(여리고)성은 집단 생활지의 모습을 보였지만 신석기시대였기에

제대로 된 문화적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요.


중세까지 성을 중심으로 방어적인 형태의 주거 도시가 형성이 되다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드디어 성의 개념이 아닌 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성내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부르주아가 착취계급의 대명사로 쓰였다는

말은 의미 깊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도시의 규모는 커져만 갔고, 메트로시티에서 메갈로시티,

메가시티, 에큐메노폴리스까지 의미가 확장되어 갑니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한 규모 확장, 팽창의 도시가 아닌 메타시티까지의 개념확장

을 이루어갑니다. 메타시티는 무조건적인 개발과 팽창의 도시가 아닌 기억과

추억, 전통을 살리는 도시, 더디지만 인간미가 살아있는 도시, 인문의 도시,

공존의 도시를 꿈꿉니다.


앞으로 인류의 대다수는 도시에서 거주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듯이 도시가 인류의

삶의 터전이라는 것은 확실할 터인데, 이러한 삶의 토대가 각박하고 냉정한,

인정없는 곳이 된다는 것은 전 인류의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저자의 메타시티의 개념은 신선한 사고로 보이고, 과거의 기억과 추억,

전통, 느림 등이 공존하는 미래의 도시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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