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사회사> 피터 버크
--“인쇄술의 발명에서 위키백과까지”
강 일 송
오늘은 21세기 최고의 문화사학자라고 하는 피터 버크의 장대한 스케일의 지식에
관한 서사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피터 버크(1937~)는 런던에서 태어나 예수회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962년부터 1979년까지 서식스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며 2004년부터 케임브리지
대학교 문화사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오늘은 저자의 지식에 대한 탄생, 생산, 유통, 소비까지의 방대한 내용 중 몇 개의
도시 중심의 이야기로 글을 이어보겠습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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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치아 — 16세기
15세기에는 베네치아에서 유럽 다른 어느 도시보다 많은 책이 인쇄됐다.
(대략 4500종이었으니, 200만 권쯤이 되었다는 의미다.) 경쟁이 치열했고 그리하여
인쇄업자들끼리 산업 첩보활동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서 경쟁서를 내곤 했다.
책의 저자에게 처음으로 저작권을 내주는 것이 이 무렵의 베네치아였던 것은
당연했다고도 하겠다.
16세기에, 베네치아는 유럽의 선도적 출판 중심지로서 자기 자리를 유지하는데,
대략 500개의 인쇄소에서 1800만 권의 책을 제작하고 있었다. 출판업자 가브리엘
졸리토는 혼자서 850종을 제작했고 볼로냐, 페라라, 나폴리에 지점을 두며 확장한
최초의 서적상이었을 것이다.
베네치아에 있던 저 많은 수의 인쇄업자들은 식자(지식인)들을 이 도시로 끌어들이는
유인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 시장이 있기에 식자들이 후원자에게 기대지 않고
생계를 이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인쇄공들 중에서 일부는 특정 출판업자들 아래서 편집자나 교정자로
일했는데, 인쇄술의 발명의 결과로 생겨난 새로운 직업들이었다.
★ 암스테르담 — 17세기
17세기에는 네덜란드 공화국이 베네치아를 대체하는데, 네덜란드 공화국이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며 상대적 관용을 보여 주는 일종의 섬으로서, 동시에 정보의
주요 중심지이자 주요 시장으로서 17세기 피에르 벨이 부른 대로 ‘종합 창고’였기
때문이다.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를 비롯한 여러 다른 말로 찍은 인쇄물의
수출은 이 신생국이 번영하는 데 큰 몫을 보탰다.
이 중심지의 중심지는 암스테르담이었다. 17세기 하반기가 되면 베네치아가 그랬듯이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서적 제작 중심지가 돼 있었다. 270명이 넘는 서적상과
인쇄업자들이 1675년에서 1699년까지 25년 사이에 이 도시에서 움직였다.
암스테르담의 인쇄업자들은 다른 언어들로 인쇄하는 것이 전문이었다. 이들은
네덜란드어,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 이디시어, 아르메니아어,
그루지아어로도 인쇄했다.
★ 런던 — 18세기
영국의 도서 시장은 16세기와 17세기에는 유럽 대륙 쪽과 비교했을 때 “본질적으로 지방적
수준”이었다고 묘사된다. 1730년대까지만 해도 책을 수출하기보다 수입하는 쪽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급속히 바뀌었는데, 1777년이면 런던에 일흔두 곳의 서적상이 있어서
당시 다른 유럽 어느 도시보다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업자’라는 표현이 이제 서적상들을 가리키고 있어서, 서적상들이 가장 잘 나가는 상인이
돼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런던에서는 처음으로 저자들이, 특히 비소설 산문 쪽 저자들이 출판업자들한테서 충분한
선금을 받게 되었고, 그리하여 후원자들과 관계를 끊고 저술 수익금으로 살아갈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 출판업자들이 자금을 미리 조성하는 방법으로 예약을
받아 출판을 하기도 하였다.
★ 나가사키와 데지마
유럽사람들은 1550년 무렵 이전에는 일본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13세기 여행자 마르코 폴로가 ‘지팡구,Cipangu’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가 1549년 어떤 땅에 도착했는데
그에게도, 또 본국 사람들에게도 거의 완전히 낯선 곳이었다.
16세기 말 이후로는 계속, 일본에 관한 지식이 유럽에 전해지는 경로는 나가사키 항을
거쳤다. 1580년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한 권력자가 이 도시를 예수회에 헌납했다.
예수회는 1587년 나가사키 영유권을 잃게 되지만, 선교 본부는 남아 있었고,
인쇄소도 하나 세워져 있었다. 기독교의 일본 선교는 성공한 경우였다.
사실 너무 성공적이어서 문제가 됐는데, 기독교가 퍼져 나가면서 일본 통치자들이
위협을 느끼게 했고, 그리하여 선교사들과 개종자들을 박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쇄국’정책을 펴도록도 했던 것으로, 쇄국 정책은 1630년대부터 1850년대까지
지속됐다.
나라가 외국인들에게 완전히 닫혔던 것은 아니었으며, 외국 상대 관계들은
통상 관계를 포함해서 최소한으로 줄어들었고, 엄격하게 통제를 받았다.
이 기간에는 네덜란드 상인들이 주요 교류 창구로서 포르투갈 예수회에서
그 역할을 넘겨받았고, 나가사키는 나가사키대로 근처의 섬 데지마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데지마는 인공섬이었는데, 사방으로 불과 몇백 피트씩 가면 끝이었고, 이 섬을
나가사키만에 조성한 것은 바로 위험한 유럽인들을 통제 아래 묶어 두려는
목적에서였다.
네덜란드 교역상들은 연합 동인도회사 소속이었으며, 이 협소한 공간으로만
활동이 제한됐다. 그러다가 1850년대에 미국 함대의 강제로 일본이 항구들을
서양인들에게 열어 주게 된다.
데지마는 또한 지식의 교환이 일어나는 미소 환경이기도 했다. 일본 조정은
일본 지도들의 반출을 금지했고, 거기에다 외국인들이 일본어를 배우지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결국 지식의 전파는 이루어졌다.
★ 지식의 산업화, 상업화
이제까지의 출판 쪽의 흐름은 ‘서적의 상업화’로 요약할 수 있으며 다시 이 과정은
18세기에 ‘소비자 혁명’, 또는 ‘소비자 사회의 탄생’이라 부르게 되는 것으로
특히 잉글랜드에서 두드러졌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일본에서는 17세기 이후로 계속 서점들의 출현과 맞물려 인쇄의 급격한 증가가
있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읽을거리로 ‘가나조시’라고 했으며 한자가 아니라
더 단순한 음절문자(가타카나)로 썼으며 한자를 배우지 못했던 독자층들, 특히
여성들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1696년이면 교토의 서적상들은 도서목록을
발행해 저자며 제목, 출판업자, 가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고 거의
8000종이 나와 있었다.
중국은 16세기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이탈리아에 비해 중국은
책들이 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근대 초기 중국에은 역사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문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책력이나 소형 백과사전들도 많았고
유럽에서처럼 중국에서도 정보의 ‘상품화’로 나아가는 흐름이 있었다.
중국에서의 백과사전 전통은 기원후 3세기까지로 거슬러가며, 명 왕조에만, 곧
1368년부터 1644년 사이에 139종의 백과사전이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세기 초의 “영락대전”은 약 2000명의 집필자가 참여했고 1만 권이 넘어갔으며
인쇄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들었고 보존도 어려웠다. 청나라 초 황제의 후원아래
“고금도서집성”이 나왔는데 분량이 75만 쪽이 넘어 인쇄된 책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책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인쇄에 대한 당국의 통제가 중국보다 훨씬 더 엄격했으며 민간 차원의
서적 제작과 판매가 금지됐던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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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최고의 문화사학자이자 저술가인 저자를 통해 "지식"이 어떤 식으로 우리
인류사에서 탄생하고 유통, 소비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저자는 지식의 폭발적인 생산과 유통, 소비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고, 이후 현대의 구글, 위키백과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를 이책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중 흥미로운 부분이 도시를 통해 지식의 역사를 들여다 본 것이었는데,
16세기 베네치아, 17세기 암스테르담, 18세기 런던에 이르기까지 세계 역사의
중심이 바뀌어 온 내용이었습니다.
또한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가 일본에 지식의 전파, 문화, 종교의 전파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나가사키와 데지마섬을 통한 내용이 이어졌습니다.
16세기에 이미 중국은 마테오 리치가 이야기했듯이 책이 상당히 싸다고 했고
이는 책의 유통이 대단했음을 방증하고 있지요. 일본도 이미 17세기에 서점이
번성하고 인쇄물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가타카나를 통한 한자를 배우지 못한
일반 백성들도 책을 볼 수 있었음은 놀라울 뿐입니다.
마지막에 저자는 한국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을 했는데 인쇄에 대한 당국의 통제가
중국보다 엄격했고 민간차원의 서적 제작과 판매가 금지된 적도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네요.
이미 17세기에 유럽의 도시들과 일본, 중국은 서점이 번성하고 상업화되면서
국민들이 다양한 정보, 지식을 가까이 하였음에도 가장 오래된 인쇄술을
가졌던 우리나라는 이를 대중화하지 못하고 통제함으로 스스로 구한말의
위기를 자초한 것이 아닌가 반추해봅니다.
역사는 되풀이 되기도 하고, 역사는 끊임없이 현재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라고 합니다. 정보의 대중화, 지식의 대중화, 학문의 개방성 등이 진정한
현대의 강국이 되는 길이 아닌가 다시 생각해 보는 하루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