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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인문학수업- 멈춤>

“한류로서 조선의 문학”

by 해헌 서재

<퇴근길 인문학수업- 멈춤>

--“한류로서 조선의 문학”


강 일 송


오늘은 바쁜 현대인들이 하루의 일상을 마치고 퇴근길에 만날 수 있는 인문학강좌

라는 컨셉으로 기획된 인문학책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글을 쓴 주체는 백상경제연구원으로 <서울경제신문>의 부설 연구기관으로 2002년

설립된 후 다양한 인문과학 융합교육을 위해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백상경제연구원이 서울시교육청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인문학 아카데미

‘고인돌(고전 인문학이 돌아오다)’를 바탕으로 기획한 책이고, 고인돌은 8만 여 명이

수강한 인기 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이번 책은 퇴근길 인문학 수업의 <멈춤>, <전환>, <전진> 3 파트 중 <멈춤>에 해당

하는 책이고, 요일별로 다양한 주제를 선정해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 조선의 대중문화에 대한 부분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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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한류의 시작


해외여행에서 만난 외국인에게 한국인임을 밝히면 돌아오는 질문이 한결같다. 전쟁이

두렵지 않느냐는 것이다. 살면서 한 번도 의식해본 적이 없다고 답하면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5천 년 역사를 되돌아보면 지정학적 위치 탓인지 크고 작은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전쟁을 꼽으라면 단연코 임진왜란이다.

흔히 조선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생각하지만, 중국까지 포함한 동아시아

삼국의 대전란이었다.


7년에 걸쳐 전쟁을 치르는 동안 조선은 명나라와 긴밀하게 협력을 해야 했기에

과거와 달리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조선과 명나라 간의 외교는 유려한

문장을 자랑하는 문인들이 맡았던 터라, 외교 일선에서 전쟁 관련 협력은 물론

양국 문인들의 문화적 교류도 활발했다.


★ 전쟁통에 피어난 문화의 꽃


조선시대 문인들은 명나라의 학풍과 문화에 관심이 깊어 명에서 출간된 새로운

서적을 대거 수입했다.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고단해

졌지만 명나라의 문화를 실시간으로 받아들이며 조선이 문화가 변화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명나라에서 조선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명나라 공안파 문단의 핵심 멤버였던 구탄은 광해군 6년(1614년)에 조선의 관리에게

부탁하여 조선의 시집을 얻고자 했다. 전쟁이후 명나라와 조선은 서로의 문화가 수입

되었고, 사신으로 방문한 조선 문인에게 글을 달라고 졸라 중국에서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조선의 인기는 요즘의 한류와 비교해도 차이가 없어 보인다.


★ 조선의 한류스타, 이정귀


풍문으로 흠모하여 시 한 편 받은 것을 자랑하고, 중국 문화 중심지 강남 일대에

책을 출판해 배포하겠다고 판본을 가지고 가거나, 길에 나와 기다리며 온갖 환영

인사를 하고, 만나면 부채에 시 한 편을 받겠다며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것은 한류 스타의 중국 방문 모습이 아니다.


바로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중의 한 명인 이정귀(1564-1635, 李廷龜)의 이야기다.

임진왜란 당시 외교 업무로 네 번이나 북경에 갔던 그는 문장이 뛰어나 중국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조선 문인 최초로 중국에서 문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1620년 이정귀가 네 번째로 북경에 가게 되자, 명나라 문인 왕휘가 그의 시

100여 편을 모아 서문을 쓰고 북경에서 출판했다.


1626년에는 이정귀가 북경에 갔다가 병이 들어 귀국하지 못하고 6개월 동안

체류하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러 먼 곳에서 숙소로 찾아오기도

했다. 시를 한 편 받겠다고 며칠 동안 기다리기도 하고, 명나라 문인들이 그에게

음식을 보내주기도 했다.


당시 노인(魯認)이라는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중국에 표류했는데, 돌아와서는

중국 강남의 선비들이 이정귀의 글을 많이 외우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중국의

선비가 그의 글을 베껴 간직하는가 하면 산속의 승려가 그의 시를 외우고 있을

만큼 중국에서 그의 문학적 위상은 굉장히 높았다.


★ 안에서나 밖에서나 스타는 빛나는 법

두 번째 한류스타 허균


두 번째 한류 스타는 허균(1569-1618)이다. 허균도 명나라에 세 번이나 갔을 뿐

아니라, 명나라 사람들이 조선에 오면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다니는 등 열정이

뜨거웠다. 게다가 누이 허난설헌(1563-1589)의 시를 중국 문인들에게 소개하는

바람에 허난설헌도 중국에서 유명해졌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서 파견된 장수와 군인 대부분이 중국 강남 출신으로

문학에 관심이 컸는데, 그들이 조선 문인과 접촉하면서 조선 문학을 명에 소개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1597년에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오명제는 조선의 한시를 수집해서

1599년에 <조선시선(朝鮮詩選)>을 출판하고 중국에 돌아가 중국인들에게

소개했다.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명나라 문인은 주지번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주지번

영접 업무를 맡은 사람이 허균이었다. 주지번이 조선에 와서 허균에게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 중에서 좋은 것을 뽑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의 병화가 휩쓸던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에서는 ‘목릉성세,穆陵盛世’

라고 하여 글 잘 쓰는 문인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정귀, 허균, 유몽인, 이수광,

신흠, 이안눌, 차천로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목릉은 선조의 능호인데

선조 때 유독 문장이 크게 융성해서 생긴 말이다.


★ 추종만이 아닌 독자적인 문학


명나라의 새로운 문화가 조선에 물밀 듯이 들어왔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의

문학이 선진국인 명나라 문단에 바람을 일으켜 때아닌 한류 문학 열풍을

일으켰다. 조선의 문학이 중국의 문학을 추종하기만 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당시 허균은 이런 말을 했다.


“지금 내가 시를 쓰는 목적은 이백과 두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진정한 ‘나’를 찾는 데 있다. 나는 내 시가 당나라 시와 비슷해지고

송나라 시와 비슷해지는 것을 염려한다. 도리어 남들이 나의 시를

‘허자(許子’의 시라고 말하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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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새로운 컨셉의 인문학강좌를 엮은 책을 함께 보았고, 그중에서도

사대주의 시대로 알려진 조선의 문학가들이 당당하게 명나라 문인들과

경쟁하고 대중의 인정을 받는 이야기에 대해 보았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임진왜란은 일본에 의해 침략을 받고, 명나라의 원군이 이땅에

들어오는 등 엄청난 고통과 질곡의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이면에는 다른 시대보다 더 활발한 문학의

발전이 있었고, “목릉성세”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들이 출현

했던 시기였기도 했네요.


르네상스의 시대에 유독 피렌체에서 천재들이 한꺼번에 역사에 등장한 것처럼

문화적 꽃은 순식간에 동시에 피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이러한 문학적 꽃의 개화가 아이러니하게도 임진왜란 시기와 맞물려 왔네요.


보통 명나라에서 파견된 군대는 오만방자한 장졸들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국 강남 출신들이 많았군요.

어쨌든 파견 장군인 오명제는 <조선시선>을 편찬하기도 하고, 조선의 한류

스타라고 하는 이정귀, 허균은 명나라에서 많은 명성과 인기를 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허균의 대사가 인상깊은데, 당시의 흐름이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컬으며 중국에 일방적으로 기대던 사대사상이 대세이던 것을 감안하면

허균의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자신이 시를 쓰는 것이 시성이라 불리던 이백이나 두보를 닮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시를 쓰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허균은 진정 시대를 앞서간

한류스타의 면목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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