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책읽기>
--“독서, 일상 다반사”
강 일 송
오늘은 일본의 한 소설가가 쓴 그의 독서 이력의 흔적인 서평집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가쿠타 미쓰요는 요코하마 출신으로 와세다대학 제1문학부를 졸업하고
1990년 “행복한 유희”로 제9회 가이엔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데뷔했습니다.
“조는 밤의 UFO”, “대안의 그녀”, “록 엄마”, “8일째 매미” “트리 하우스”,
등 다양한 작품으로 많은 상을 수상을 했습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우리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우리가 한없이 괴로움과 지루함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책을 읽어 보리라”
라는 멋진 말이 담긴 이 책에서 마음에 드는 세 편 정도를 옮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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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날 것의 냄새
하야시 후미코, <뜬구름>
하야시 후미코가 그리는 남녀는 인간 냄새가 난다. 남자는 남자 냄새가 나고,
여자는 여자 냄새가 난다. <뜬구름(浮雲)>에 등장하는 남녀, 유키코와 도미오카는
실로 한심한 여자와 남자다. 두 사람이 질질 끌어온 교제도 질릴 정도로 한심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 한심함이야말로 인간의, 날것의 냄새라고 생각한다.
전시(戰時)중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살던 낙원과도 같던 날들을 잊지 못하고
패전 후의 일본에서 두 사람은 이별과 재회를 거듭하고 낙원을 찾아 헤매다
이윽고 야쿠시마로 향한다.
우리들은 의지를 갖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시대 속에서 떠밀리듯 살아간다.
그렇게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누구나 시대와 시간에 떠내려간다.
<뜬구름>은 우리들의 인생 어딘가 바깥에, 맞서 싸울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흐름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한다. ‘삶은 감옥이다.’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 감옥이 떠내려가면 우리들에게 저항할 방법은 없다.
갇혀 있는 듯한 압박감과 떠도는 듯한 해방감, <뜬구름>은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소설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을 힘껏 그리고
있는데도 읽고 난 후에 절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산다는 게 이런 거잖아 하고 소설 자체가 위협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 힘에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 버린다. 한심한 유키코와 도미오카의
모습이 다 읽고 나면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자신의 손톱 밑 때 냄새만큼.
★ 용서받고, 용서하다
사노 요코, <나의 엄마 시즈코상>
어머니에 대한 소설을 쓰면 인터뷰하러 온 사람의 7할이 내가 어머니와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가 악화됐는지, 어머니의 어떤 점을 싫어
했는지를 물어 진절머리 날 때가 있다. 일단 이건 소설일 뿐이고, 엄마 혹은
가족에 대해 싫었는지 좋았는지, 갈등이 있었는지 없었는지가 그렇게 단순하게
다룰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칼리플라워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같은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평소 그렇게 생각해 왔던 탓인지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몇 번이고 무릎을 치며
맞아 맞아, 하고 목소리를 높였고, 스스로도 놀랄 만큼 울었다.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에 대해 쓴 책이다. 소설이 아니다. 시즈코 상은 저자의 어머니다.
90세를 넘어 노인요양시설에 살며 자신이 누구였는지 잊어버리고 만 어머니다.
저자는 거리낌 없이 어머니를 조금도 좋아해본 적이 없었다고 쓴다.
읽어봐도 이 사람과 어머니가 얼마나 서로 성격이 안 맞았는지 아주 잘
알 수 있다. 어머니는 미안하다와 고맙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
딸에 대해 결코 칭찬하지 않는다. 베이징에서 온 가족이 돌아와 야마나시에서
살았던 3년간 엄마는 딸을 학대하기까지 한다.
자, 이 어머니는 나쁜 어머니일까. 책을 읽으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어머니는 멋있다. 교사인 아버지가 제자나 친구를 아무리 늦은 시간에
데려와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손수 요리를 만들어 대접한다. 스무 살 나이에
숨진 한 제자가 죽음을 맞는 그 순간, 이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자 그녀는
부랴부랴 그곳에 달려가기까지 했다. 늘 단정히 화장을 했고, 친구가 많았고,
가사능력 또한 출중했다.
이런 엄마 밑에서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취급을 받는다 해도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감사마저 했던 어린 딸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폭발적으로 반항한다.
거의 대화를 하지 않게 된다. 이윽고 딸은 도쿄로 떠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거리가 멀어지면서 모녀 관계는 아주 조금은 매끄러워진다. 어머니는
같이 살던 남동생의 아내에게 쫓겨나는 듯한 모양새로 딸의 집에 찾아온다.
그리고 점점 치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딸은 어머니를 노인요양시설에
입소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후 줄곧 딸은 어머니를 버렸다며 자신을 책망한다.
요양시설에서 늙은 엄마의 치매는 점점 진행되고, 전에 알던 엄마가 아니게
된다. 엄마가 아닌 그 사람은 엄마였던 때에는 결코 입에 담지 않았던 고맙다와
미안하다는 말을 ‘바가지로 쏟아붓듯이’ 떠들어댄다.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엄마는 부처님처럼 온화해진다. 그렇게 엄마를 한 번도 좋아하지 못하고
엄마와 살을 맞대지 못하고, 그랬던 걸 자학하던 딸은 어느 날 갑자기 그 자책의
감정으로부터 해방된다. 여기에는 기적과 같은 순간이 그려져 있다.
딸은 용서받았다고 느낀다. 아마 딸은 용서도 했을 거라고 읽으며 생각한다.
용서 받는 것, 용서하는 것이 결코 아름다운 행위만은 아님을, 너무나 긴 여정의
끝에 놓여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가족, 특히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식으든 생각을 한다.
좋다 싫다와는 또 다른 감정으로 원망하거나, 감사하거나, 죄책감을 느끼거나, 말로
할 수 없는 무언가를 품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말로 하지 않는다. 말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을, 이 작가는 해냈다. 속속들이, 한 점의 티 없이,
장식도, 허세도 없이, 미화하는 일도 없이 어머니라는 존재와 마주보고, 어머니와
마주본 자기 자신과 마주보고, 자신의 몸을 깎아내듯 언어로 담았다.
그저 압도되었다. 압도된 채로 나 자신도 마지못해 나의 엄마와 나라는 존재와
마주하게 된다. 엄마와 자식의 관계라는 것은 얼마나 복잡하게 뒤틀려 있는지.
그 뒤틀림 속에서 자식은 얼마나 많은 것을 얻는지.
어머니의 침대에 나란히 누워 뒹굴고, 처음으로 늙은 엄마와 살을 맞댔을 때
딸이 느낀 세계를 덮은 막이 단번에 벗겨지는 듯한 해방감을 나 또한 맛보았다.
나의 엄마는 이제 없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문장에 의한 엄마와 진정한 의미로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에 감싸인 기분이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끝없는 용서 속에, 나도 엄마도 분명히 존재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 책은 사람을 부른다.
책은 사람을 부른다. 서점 통로를 걸으면 나에게만 말을 거는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나는 그 속삭임에 충실하게 책을 뽑아든다. 그렇게 만난 작가가 여러 명
있다. 연인은 한 명인 게 바람직하지만, 책의 경우는 세 명, 네 명, 아니
열 명이라도, 나와 잘 맞는 ‘엄청 좋은’ 상대를 발견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상대는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더 행복해진다.
책이 있는 장소는 도서관이든 헌책방이든 대형 서점이든 어린 시절과 같이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나에게 있어 네 살 때 손에 쥔 그림책도, 어제 읽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도 지금 다시 읽고 있는 하야시 후미코도 모두 똑같다.
글자를 눈으로 좇는 것만으로도 그 책은 내 손목을 붙잡고 미지의 곳으로
나를 데려다 준다. 그 구석구석을 보여준다.
너무나 재미있는 책을 만나게 되면, 읽으면서 나는 곧잘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세상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겠지만 이 책이 없었다면, 그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가 보는 세상에는 색 한 가지가 빠져 있는 채였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이 책이 있어 다행이야. 고마워. 친구가 없고,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을
못하던 미숙했던 작은 아이처럼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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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유명 소설가이자 독서가인 저자가 다양한 책을 읽고 자신의 소회를
풀어 쓴 책을 함께 보았고, 마지막은 독서에 대한 본인의 느낌과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독서후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작품이 될 만큼 그만의 사유가 녹아
있고, 독서에 대한 철학도 공감이 무척이나 많이 됩니다.
때로는 긴 말보다 각자가 글을 읽고 그 느낌을 가져보는 것이 긴 설명을 하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는데 지금 글들이 그런 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번 읽으면서 생각의 물고기들을 건져 올리는 시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