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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Jan 08. 2019

<맛의 천재> (2) “커피의 역사”

<맛의 천재> (2) “커피의 역사”

“이탈리아 맛의 역사를 쓰다”


                                                 강 일 송


오늘은 이탈리아 음식에 대한 이야기 두 번째로 커피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알렉산드로 마르초 마뇨(1962~)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났고, 베네치아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역사 잡지 <Focus Storia>에서

일하는 한편 경제 일간지 <Il Sole 24 One>에서 음식 문화 소식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비스 섬의 사자;달마티아 여행>, <베네치아의 운송수단;곤돌라의 역사>,

<1687년 아테네>, <책공장 베네치아> 등이 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예멘을 거쳐 아랍세계의 주음료가 되었다가 유럽으로 전해지고

세계로 퍼져나간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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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만제국의 카베


1573년 베네치아 의회의 의원들에게 코스탄티노 가르초니는 콘스탄티노플 대사로서

수행한 임무에 대해 보고하는 동안, 오스만제국 사람들이 정신없이 마셔대는 검은색

음료에 대한 언급을 하였다. 일종의 진정제임이 분명했지만 무엇을 재료로 만들었

는지는 그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보다 12년 늦게 ‘카베,cavee’라는 이름으로 커피에 대한 기록을 남겼던 베네치아

대사 잔프란체스코 모로시나 라는 사람도 있었다.


유럽이 동방으로부터 들여온 음료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커피였고 또 하나는

차(Tea)였다. 1585년 바티칸에 파견중이던 대사 로렌츠 프리울리는

“일본 대사들이

교황과 대담하는 동안 뜨거운 물에 검은 잎을 띄워 마시는 이상한 광경을 놀라워

하면서 목격했다.”고 서술한 바 있다.

그러니까 두 명의 베네치아인이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될 음료, 커피와 차의 존재를

처음으로 유럽에 알렸던 것이다.


★ 에티오피아에서 오스만제국으로


커피가 가장 먼저 보급된 곳은 오스만제국으로, 에티오피아의 고산지대 카파(Kaffa)

에서 처음으로 들여왔다. (아마도 카페나 커피라는 이름은 이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에티오피아 커피의 80%가 생산되고 있다.

서기 10세기경 예멘의 상인들이 배로 커피를 운송하기 시작하면서 기점으로 삼았던

항구는 메카였다. (‘모카,Moka’라는 단어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메카는 수 세기에 걸쳐 커피를 전 세계로 보급하는 수출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아주 오래전 아랍인들은 커피 알갱이를 씹어 먹고 이파리는 차를 만드는 데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먼저 커피 알갱이로 음료를 만든 사람은 이슬람의

수도사 알샤딜리다. 결과적으로 터키인들이 예멘을 정복한 15세기에는 이미

전세계의 이슬람교도들이 모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 교황과 커피


1600년대 초에 몇몇 추기경들이 교황 클레멘스 8세에게 “지옥을 연상시키는 악마의

음료”에 대해 금지령을 내려달라고 촉구하였다. 색깔이 검다는 점, 그리고 수피파의

추종자들이 예배를 볼 때 사용하던 음료라는 사실 때문에 커피는 성찬식용 포도주를

악마적으로 왜곡한 음료라는 시선을 피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교황의 의견은 달랐다. 커피를 맛보고는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교황은 금지령 제안을 거부하고 말았다. 만일 클레멘스 8세 앞으로 가져간 커피가

지독히도 맛이 없었다거나 혹은 그날 교황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어쩌면 지금쯤 아예 커피가 없는 세상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금지령 – 커피를 알리는 결정적 역할을 하다.


17세기 초가 되자 온 천하가 커피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의사들도 커피를 권하기 시작했다. 비록 값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지만

향료를 파는 가게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데다 교황까지 인정한 음료였다.

하지만 결국 커피를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인가가 아닌 금지령

이었다. 금지령보다 효과가 더 뛰어난 광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커피가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셈이다.


커피숍에서 사람들은 자유분방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따라서 누군가 권력층을

상대로 음모를 꾸민다든가 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1633년 엄격하기로 소문난 술탄 무라트 4세는 커피숍이 그를 위협하는 세력들의

회합 장소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모든 커피숍의 폐업을 명령하고 본을

보여주겠다고 몇몇 커피 애호가들을 사형해버렸다. 이스탄불을 화재의 위험

으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것이 공식적인 성명 내용이었지만 사실 술탄이 언급한

화재란 결국 정치적인 화재를 뜻했다.


이렇게 오스만제국의 수도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직업을

잃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들 중 일부는 새로운 직업을 찾았지만 좀 더 적극적인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나라에 커피를 수출하기로 결심했다.


★ 유럽 최초의 커피숍 논란


유럽의 첫 커피숍이 어느 도시에서 문을 열었는지에 대한 논쟁은 아마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거론되는 도시가 동방의 문으로 불리던 베네치아(1645)

와 중동 출신의 유대인이 첫 커피숍을 연 것으로 알려진 옥스퍼드(1650)라는 사실은

유럽의 커피 문화가 이슬람 세계와의 교류가 이루어지던 곳에서 시작되었음을

그대로 증명한다.


★ 베네치아와 커피


유럽에서 커피의 보급은 단순히 맛과 관련된 문화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치적인

문제였다. 적의 위협이 사라질 때 적의 문화를 수입하는 것이 보통이다.

베네치아는 터키와의 전쟁보다 무역을 훨씬 더 선호했던 나라이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터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고, 베네치아만큼 터키의 문화를 잘 수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17세기 초 베네치아에서 커피는 주로 향료가게에 가야 구할 수 있었는데,

17세기 말에 이르러 최초의 커피숍들이 문을 연다. 가장 먼저 가게를 차린 사람들은

이미 제과점을 운영하고 있던 그라우뵌덴 출신의 스위스 사람들이었다.


1720년 12월 29일, 행정부 신관 건물 밑에 플로리아노 프란체스코니가 ‘승리의 베네치아’

라는 이름으로 카페를 열고 영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들 주인의 이름으로 이 카페를

불렀기 때문에 결국에는 ‘플로리안’으로 이름을 바꾸고 말았다. 지금도 있는 카페

플로리안은 1859년 로도비코 카도런이 테마별로 룸들을 재정비한 모습 그대로다.

18세기 중엽에 베네치아에서 영업을 하던 카페는 100개가 훨씬 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커피와 초콜릿


커피숍은 만남의 장소였고, 큰 소리로 낭독하던 신문의 소식을 듣기 위해 모이는 장소

였다. 일종의 각성제인 커피는 지적 활동을 촉진하는 음료로 자리잡았다.

반면에 초콜릿 음료는 귀족들의 나태함을 상징했다.

또한 당시의 커피 문화가 가지고 있는 무시할 수 없는 특징 중 하나는 커피의 가격이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는 점이다. 커피는 초콜릿 음료 가격의 3분의 1밖에 하지 않았다.

커피 가격이 내려간 것은 재배 지역이 중남미와 인도네시아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최고 품종은 ‘아라비카,arabica’였다


★ 에스프레소의 등장


커피숍이 늘어나고 아메리칸 바(음료를 선 채로 마실 수 있는 곳)가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커피 만드는 시간을 줄일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물을 끓이는 시간도 길었고, 커피를 마시기 전 커피

가루가 바닥에 가라앉을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커피 기계를 처음 고안해낸 사람은 토리노 출신의 안젤로 모리온도다. 그가 고안해낸

기계는 1884년 토리노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의 신문기사는 “모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기계로, 증기를 이용해 한 시간에

300잔의 커피를 뽑아낼 수 있다.”


이후 많은 혁신이 이루어졌고 이런 기계들 가운데 마지막이라고 볼 수 있는 기계는

1961년 파에마에 의해 제작된다. 마지막이라고 보는 이유는, 오늘날 바에서 사용하는

에스프레소 기계들이 이와 똑같은 원리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마시는 커피의 세계가 변화한 것은 1933년 알폰소 비알레티가 모카 엑스프레소

를 고안한 이후다. 비알레티의 모카 엑스프레스는 커피를 만드는 방식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인들의 생활 방식 자체를 변화시켰다. 에스프레소는 밖에서 마시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모카포트의 도래로 인해 일하기 전에 집에서도 에스프레소를 만들어

마실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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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핫(hot)한 음료이자 가장 성공한 음료인 커피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보았습니다.


커피는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음료이지만 그 시작은 아프리카의 한 계곡

이었습니다.

한때는 예멘이 커피의 고향으로 알려졌지만 과학적인 연구 끝에 에티오피아가

원산지임이 증명되었고, 카파 지역은 카페와 커피의 어원이 되었다 합니다.


커피의 각성효과와 맛, 향이 알려지자 이슬람 세계에서 먼저 통용이 되었고

이들과 교류하던 베네치아가 커피의 존재를 가장 먼저 알아차립니다.

오스만제국과 전쟁을 하면서 오스트리아를 통해서 커피가 유럽으로 들어간

루트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커피가 가장 번성한 지역이 됩니다.


지금도 존재하는 베네치아의 카페 플로리안은 그 고풍스러운 전통이 아직도 전해

져 오고 있지요.  개인적으로도 플로리안에서 커피를 마실 때, 서빙을 하던

우아한 중노년의 남성들이 기억이 납니다.

커피는 지적인 부르주아의 음료였고, 초콜릿은 부유한 귀족들의 음료였다는

내용이 가슴에 닿네요.


커피가 처음에는 악마의 음료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클레멘스 8세 교황의 승인

에 힘입어 유럽이 커피를 마시게 되었고, 역사의 만일(IF)을 이 사건에 대입시켜

본다면, 이때 교황이 커피를 금지시켰다면 지금처럼 커피가 이 세계를 주름잡을

수 있었을까 의문도 듭니다.


스타벅스가 최근 밀라노에 상륙했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휴게소 자판기에서 마시

게 되는 1유로의 커피맛이 환상적이었음을 상기할 때, 스타벅스가 이제야 이탈

리아에 들어오게 된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시간이 많이 걸리던 커피 추출이 이탈리아 발명가들에 의해 아주 빠른

시간에 커피를 내려 마실수 있게 되었고, 밖에서만 마시던 커피가 가정내에서

마시게 된 것도 이탈리아의 공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흔히 에스프레소가 영어 Express의 표기라고 하지요.  드립 커피를 내려보면

확실히 에스프레소를 뽑는 것이 빠르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차(Tea)가 쉼의 문화라면 커피는 각성과 효율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대비가 될 수 있지만, 커피를 통해서 충분히 쉼과 휴식을 할 수도 있기에 너무

억지로 구분을 지을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향긋한 커피 한 잔과 함께 편안한 시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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