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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우리는 모두 가면을 쓴 존재> (3)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中

by 해헌 서재

<페르소나-우리는 모두 가면을 쓴 존재> (3)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中


강 일 송


오늘은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편의 세 번째 이야기를 이어보려고 합니다.

프로이트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의 인간의 인격(人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야마구치 슈(山口風)로 게이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미학미술사

석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일본 최대 광고 회사 덴쓰(電通)를 시작으로 보스턴컨설팅

그룹과 AT커니를 거쳐 조직 개발, 혁신, 인재육성, 리더십 분야의 전문 컨설턴트로

자리매김합니다. 현재 콘페리헤이그룹의 시니어 파트너이자 히토쓰바시 대학교

경영연구과 겸임 교수로 일하고 있고 저서로는 <그들은 어떻게 지적 성과를 내는가>,

<세계의 리더들은 왜 직감을 단련하는가>, <읽은 대로 일이 된다> 등이 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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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소나(persona) - 외적 인격


인격(personality)은 그 자체의 정의로 볼 때 본래 짦은 시간에 크게 변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상황이나 주변과의 관계를 위해 인격을 달리 포장해야

할 때가 있다. 이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사람이 심리학자 카를 구스파프 융이다.

그는 인격 가운데서 외부와 접촉하는 “외적 인격”을 페르소나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페르소나는 원래 고전극에서 배우가 사용하는 ‘가면’을 뜻하는데, 융은 페르소나를

한 사람의 인간이 어떠한 모습으로 밖으로 드러내는가에 관한, 개인과 사회 집합체

사이에서 맺어지는 일종의 타협이라고 정의했다.

즉, 실제 자신의 모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가면이 페르소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실제 타협의 범위가 그다지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기에 항상

‘어디까지가 얼굴이고 어디까지가 가면인가’ 하는 물음이 따라다닌다.


★ 가면과 맨 얼굴의 모호한 경계


가면과 맨 얼굴의 경계가 애매해진다는 모티브에 우리가 끌리는 이유는, 자기 정체성이나

인격이 실제로는 매우 취약하며 외부 환경에 따라 왜곡되기도 하고 감추고 싶었던

무의식이 표출될 염려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팬터마임을 예술의 영역까지 끌어올려 침묵의 시인이라고 불린 배우 겸 연출가 마르셀

마르소의 퍼포먼스에는 자기가 쓰고 있는 가면이 벗겨지지 않아 애먹는 피에로가 등장

한다. 마르셀 마르소의 연기 자체가 박진감이 넘치기도 하지만, 이 ‘쓰고 있는 가면이

벗겨지지 않는’ 이야기에는 우리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하는 무언가 본질적인 것이

숨어 있다.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작곡가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는 이탈리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소재로 한 오페라인데, 극 중의 극에서 주인공은 극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여

아내를 죽이고 만다. 이는 본래 가면을 쓰고 있어야 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그만 얼굴을

노출하고 만 상황이 얼마나 큰 위험을 불러올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 다면적 인격의 균형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 즉 페르소나와 진짜 자신과의 불일치에 부정적 감정이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상 모든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사람의 인격은 다면적이어서 우리는 실제로 어떤 장소에서 걸치고 있던 페르소나를 다른

장소에서는 또 다른 페르소나로 바꿔 쓰면서 어떻게든 인격의 균형을 유지해 살아간다.

인간이 어느 정도 마음 편히 살아가고자 한다면 일종의 다중인격도 필요하지 않을까?


인간은 고대로부터 여러 페르소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 살아왔는데, 이는 생존전략으로

기능을 해왔고 이들의 적절한 균형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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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철학 이야기 중 세 번째로, 외적 인격, 페르소나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속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변하는 마음을 그대로 다 표현한다면 정상적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전 영화 중에 거짓말을 못하고 있는 그대로 다 표현하는 사회를 그린 영화가

기억나는데, 엄청난 혼란이 발생하더군요.


또한 인생은 그 자체가 커다란 "연극"이라고 하고, 우리는 그 연극 무대에 선 배우

들이라는 비유도 많지요. 각자 자신의 역할을 맡고 그 배역을 성실히 연기해야만

하는 배우. 그렇게 본다면 페르소나는 결국 매번 다른 배역을 맡고 그 역을 연기

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생각이 됩니다.


<팔리아치>에서 보여진대로 극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여 극무대에서 살인까지

저지른 사건을 보면, 다면적인 인격을 각 상황에 맞게 인식하고 표현하여야 하는

현대인들의 고충을 어느 정도 알게 됩니다.

과거 고대나 중세보다 훨씬 더 많은 사회적 관계를 맺게 되는 현대인들은 더 많은

페르소나를 가지게 되고, 그 역에 맞게 변신을 해야 하는 데 많은 피로감을 느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저자는 이러한 페르소나는 인간의 사회적 삶에서 필요불가결한 면이 분명히

존재를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간의 적절한 "균형"이라고 말합니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이러한 균형을 중시하여 "중용"이라는 덕을 강조해왔고

현대에 와서도 이러한 "중용", "균형감"의 중요성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각자의 삶에서 맡은 다양한 역할, 엄마아빠로서의, 직장 사원으로서의,

학생으로서의, 등등. 이러한 역할을 피하려 하지 말고 각각의 역할이 치우치지

않게 균형을 가지고 적정함을 유지하면서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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