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헌 서재 Sep 07. 2016

<칼의 노래>

김 훈

<칼의 노래> 김 훈


                                      강 일 송


작년에 영화 “명량”의 인기가 예사롭지 않았었지요?

또한 예전에 나왔던 소설인 김훈의 <칼의 노래>도 

다시 판매량이 7배 늘었다는 기사도 나왔었습니다.

시대는 항상 “영웅”을 필요로 하는 법인지라, 지금은 “영웅 이순신”을

필요로 하는 시대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세월호 사건 등을 겪으며, 믿고 의지할 국가나 지도자의 부재에 목마른 국민들이

이순신장군을 다시 현대로 불러내었을까요?


김훈의 <칼의 노래>는 장편소설이나 차라리 시(詩)에 가까운 구절들이 즐비합니다.

소설 내용 중 인상 깊은 부분들을 한번 소개하고자 합니다.


------------------------------------------------------------


한산도 야음(夜吟)


            이 순 신


한 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속으로 불려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


목이야 어디로 갔건 간에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몸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내가 알 수 없는 뼛속의

심연에서, 징징징, 칼이 울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등판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캄캄한 바다는 인광으로 뒤채었다.


-------------------------------------------------------------


권률은 의병장 김덕령의 혐의를 수사하지 않은 채, 묶어서 서울로 보냈다.

또 의병장 곽재우도 얽혀들어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

임금은 강한 신하를 두려워했다. 임금에게 의병은 뒤숭숭한 무리였다.

천하가 임금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김덕령은 용맹했기 때문에 죽었다. 임금은 장수의 용맹이 필요했고 장수의

용맹이 두려웠다. 사직의 제단은 날마다 피에 젖었다.


-------------------------------------------------------------


나는 그 칼이 뿜어내는 적의의 근원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적의 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선명하게 드러난 운명이었다.

적의 칼이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칼날의 아래쪽에 글자가 몇 자 새겨져 있었다.  죽은 척후장의 검명인 모양

이었다. 나는 칼을 눈앞으로 바싹 당겨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에 젖는구나.


------------------------------------------------------------


명나라 장수 “진린”은 쓰러지도록 마셨고, 술 취한 진린의 부하들은 죽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시를 혀 꼬부라진 소리로 노래 불렀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

명량에서는 순류(順流)와 역류(逆流)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함대가

그 흐름에 올라탄다 하더라도 마침내 올라탄 것이 아니었다.

때가 이르러, 순류의 함대는 역류 속에 거꾸로 처박힌 것이었다.

명량에서는 순류 속에 역류가 있었고, 그 반대도 있었다.

적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여기는 사지(死地)였다.

수만 년을 거꾸로 뒤채이는 그 물살을 내려다보면서, 우수영 언덕에서

나는 생사와 존망의 흐름을 거꾸로 뒤집을 만한 한 줄기 역류가 내 몸속의

먼 곳에서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


임금은 적이 두려웠고, 그 적과 맞서는 수군통제사가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임금의 싸움이었다.

수군이 비록 외롭다 하나 이제 신에게 오히려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온즉.....


그리고 나는 한 줄을 더 써서 글을 마쳤다.


.............신의 몸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에는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삼도 수군통제사 신(臣) 이(李) 올림


-------------------------------------------------------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陳)으로 적을 맞으리.


--------------------------------------------------------


개인적으로 <칼의 노래>는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소설이었습니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한 뭉텅이의 서사시와 같은 그 문장들에

현혹이 되었고, 김훈이라는 작가에 매혹이 되었었지요.


이순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로 와서 영웅이 되었지만, 그는

또한 근심하고 두려움도 가진 인간일 수밖에 없었고, 그의

인간적인 고뇌는 여간 깊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자 김훈은 말합니다.

“삶은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 없는 생명의 운명이

원고지 위에서 마주 부딪히고 있습니다.  말은 현실이 아니라는

절망의 힘으로 다시 그 절망과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 아마도

말의 운명인지요.“


이 소설은 나에게 우리가 현재 처한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현실의 운명을 생명의 기운으로 당당히 맞서서 부조리해 보이는

세상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쳐 나가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함뿍 담아 나의 곁에 있음을 오늘 이 순간 느끼게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라면을 끓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