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헌 서재 Sep 07. 2016

<라면을 끓이며>

김 훈

<라면을 끓이며> 김 훈

 

                              강 일 송

 

오늘은 좀 분야를 달리해서 산문을 한 번 보겠습니다.

소설 “칼의 노래”로 유명한 김훈 작가의 신작입니다. 작가는 소설가이지만

시적인 분위기의 산문을 쓰는데, 고심의 산통을 겪으면서 글을 쓴다는 것이

그의 글을 보면 느껴져 옵니다.

 

그의 여러 산문 중 개인적으로 인상 깊은 부분을 추려서 한번 옮겨 보겠습니다.

 

--------------------------------------------------------

 

<라면을 끓이며>

 

나는 허름한 식당에 친밀감을 느낀다. 식당의 간판이나 건물 분위기를 밖에서 한번

쓱 훑어보면 그 맛을 짐작할 수 있다. 가게 이름이 촌스럽고 간판이 오래되어서

너덜거리고, 입구가 냄새에 찌들어 있는 식당의 음식은 대체로 먹을 만하다.

계통이 없는 수많은 메뉴를 유리창에 써붙인 집은 잘하는 집이 아니다.

 

삼겹살을 구워서 상추에 싸고 거기에 쌈된장 찍은 마늘을 얹어서 아래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리고 욱여넣는 식사법은 한국인이 발명한 종합적인 “한입”이다.

생선회도 이렇게 먹는데, 여기에 깻잎이 추가된다. 이 “한입”은 쌀밥, 육류, 야채,

양념, 향신료 모든 것을 한 방에 멱여준다. 이것은 온갖 맛의 패키지인데, 먹고

싶은 욕망을 순식간에, 그리고 싸잡아서 만족시킨다.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그 외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

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맛은 추억이나 결핍으로

존재한다. 시장기는 얼마나 많은 추억을 환기시키는가.

 

라면의 탄생은 수천 년 동안 이어진 허기를 달래준, 식량사의 전환으로 꼽힌다.

라면의 제조기술은 모두 일본에서 배운 것이지만 한국 라면은 1인분의 양이 일본의

것보다 1.5배 칼로리가 높아서 한 끼의 식사가 될 수 있도록 보강되었다.

라면의 등장은 1차 산업으로 식재료를 증산하지 않더라도 대량 가공과 보관, 유통과

가격 정책만으로도 식량난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미군에게 얻어먹던 내 유년의 레이션 맛과 초콜릿의 맛을

생각한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계장의 닭들과 사지를

결박당한 과수원의 포도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들과 양식장에서 들끓는 물고기들을

생각한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사람들의 목구멍을 찌르며 넘어가는 36억 개 라면의

그 분말수프의 맛을 생각한다. 파와 계란의 힘으로, 조금은 순해진 내 라면 국물의

맛을 36억 개의 라면에게 전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눈을 팔다가 라면이 끓어 넘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라면의 길은 아직도 멀다.

 

 

<밥>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배터리가 다 떨어지면 핸드폰

은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죽는다.

모든 먹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모든 포유류는 어금니로 음식물을 으깨서 먹게 되어

있다. 지하철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짜장면을 먹는 걸인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냅킨

을 두르고 거위간을 먹는 귀부인의 동작은 같다. 그래서 밥의 질감은 운명과 같은

정서를 형성한다.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다시 밥을 벌 수가 있다.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시위현장에서 시위대와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

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돈>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

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 더 거룩하고

본질적인 국면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얘야, 돈이 없다면 돈보다 큰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부(否)라!

 

돈은 인의예지의 기초다. 물적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놓은 것들이 대부분

무너진다. 이 사태는 인간의 삶의 적이다. 이것은 유물론이 아니고 경험칙이다.

이 경험칙은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공히 유효하다.

돈 없이도 혼자서 고상하게 잘난 척하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우리는 마땅히 돈의 소중함을 알고 돈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돈을 사랑하고

돈이 무엇인지 아는 자들만이 마침내 삶의 아름다움을 알고 삶을 긍정할 수 있다.

주머니 속에 돈을 지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대답은 자명한 바 있다.

돈을 벌어야 한다. 우리는 기어코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의 고난으로 돈을

버는 사내들은 돈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돈은 지엄한 것이다.

아, ‘생의 외경’, 이 외경스러운 도덕은 밥벌이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

 

밥이란 쌀을 삶은 것인데, 그 의미는 심오하다. 그것은 공맹노장보다 심오하다.

밥에 비할진대, 유물론이나 유심론은 코흘리개의 장난만도 못한 짓거리다.

윤기흐르는 낱알들이 입속에서 개별적으로 씹히면서도 조화를 이룬다.

이게 목구멍을 넘어갈 때 느껴지는 그 비릿하고도 매끄러운 촉감, 이것이 바로

삶인 것이다. 이것이 인륜의 기초이며 사유의 토대인 것이다.

 

나는 예순이 훨씬 넘도록 나이 먹었지만, 돈을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한다.

돈은 실물인가, 아니면 실물을 유통시키고 교환시키는 기호에 불과한 것인가.

돈은 기호이지만, 세상만물에 대한 포괄적인 구매력을 행사한다. 사람들이 다들

돈을 좋아하는 이유는 돈의 이 포괄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천 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퇴계의 초상을 들여다볼 때마다 기호와 실물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꽃>

 

옆집에서 마당에 매화나무를 심었다. 올봄에 꽃이 피었는데, 처음에는 이슬 같더니

며칠 지나니깐 구름 같았다. 내 방에서 이 나무가 잘 보인다.

그래서 옆집에서 심은 나무는 내 집 마당에 심은 나무와 같다. 나무나 풀은 본래

주인이 따로 없고, 바라보는 사람이 주인이다.

 

농협직영 꽃가게를 갔다. 야생화는 한 포기에 5천 원씩이었고, 수입종이나 개량종은

2천 원씩이었다. 버려진 들판에 피어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야생의 풀꽃들이

더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버려진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배가 어느정도 불러진 연후에야, 그리고 화려하고 요란한 것들을 싫증나도록

누린 연후에야, 그 초라한 것들의 아름다움이 비로소 보이게 되는 모양이었다.

 

꽃을 산 사람들은 제 손에 들린 꽃을 각별한 애정의 눈으로 들여다 보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인간들은 애처롭고도, 애처로운 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은, 그야말로 들판에 피는 야생화처럼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때가 되면 무자비하게 짓밟힐 수 있다. 그리고 이 설명할

길 없는 비극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꽃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하고 많은 꽃들

중에서 제집 베란다의 꽃을 더욱 애지중지한다.

 

-------------------------------------------------------

 

오늘 본 글들은, 예순을 넘어 일흔을 바라보게 된 작가의 독백과도 같은

글이었습니다.

본인 스스로 “먹고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 보는 비애”를 가감없이 꾸밈없이

민낯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춥고 배고픈 허기짐의 유년을 떠올리며, 라면을 끓입니다. 미군의 레이션과 초콜릿을

얻어 먹던 그 허기가 라면을 통해 되살아납니다.

라면을 끓일 때, 하필이면 작가는 결박당한 과일나무와, 들끓는 양어장의 물고기의

파닥임, 공장같은 곳에서 길러지는 수많은 닭들을 떠올립니다.

그러면서 수없이 라면이 끓어 넘치는 줄을 몰랐다 하지요.

 

밥벌이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하면서,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는 표현은 정말 작가답습니다.

시위하다가도 조용하고 평화로워지는 점심시간, 시위대나 전경이나 똑같이 그들은

밥을 먹습니다. 이 순간, 밥은 중용이고 평화이네요.

 

돈에 대해서 아들에게 이야기하듯 하는 독백은 허식을 다 떨쳐버린 솔직함의 극치가

드러납니다. 공맹노장이나 유물론, 유심론 등은 코흘리개의 장난만도 못하다합니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밥알의 느낌이 모든 삶의 철학과 윤리와 도덕이라고 합니다.

 

일흔이 바라보는 노작가의 경험칙은 모든 이론을 뛰어 넘습니다.

냉철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그 바탕위에서야 비로소 삶을 논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한껏 공감이 됩니다.

 

버려지고 밟힐지라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야생화처럼, 그리고 그 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의 세상은 작가가 꿈꾸는 그런 세상이겠지요?

 

칼의 노래에서처럼 비장함과 장엄함은 보이지 않지만, 솔직함과 담백함이 두드러진

멋진 글을 이 책에서 만나게 되어 행복하였답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거품 예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