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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Dec 30. 2019

<당신 생각하느라 꽃을 피웠을 뿐이에요>

“나태주 엮음 시집(詩集)”

<당신 생각하느라 꽃을 피웠을 뿐이에요>
“나태주 엮음 시집(詩集)”

                                               강 일 송

오늘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시인, 나태주 시인이 엮은 시집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나태주(1945~) 시인은 공주사범대를 졸업하고 충남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하였고 오랜 기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심을 담은 작품들을 지어왔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풀꽃>이라는
시로 너무 유명하지요.

오늘 이 시집에서 몇 편의 시와 함께 시 감상을 함께 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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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늘

              나 태 주

지금 여기
행복이 있고

어제 거기
추억이 있고

멀리 저기에
그리움이 있다

알아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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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은 70대의 연세에도 여전히 동심을 잃지 않고 순수함을 간직한 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을 오래해서 그렇다고 하지만 초등학교 선생님이라고
다 그렇지는 않을진대, 천생 타고난 시인이지요.
시인의 대표시인 <풀꽃>처럼 이 시도 아주 짧습니다. 하지만 짧다고 해서 감성이
약해지는 것도 아니고 내용이 빈약한 것도 아닌 것이 시의 특징이지요.

저는 시의 순서를 거꾸로 보려고 합니다. 멀리 저기에 “그리움”이 있고, 어제 거기에
“추억”이 있으며, 지금 여기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이란 것이 멀리 저기에, 어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사실을 잊지말고 알고 살자고 다시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이란 크고 거창한 곳에, 먼 과거나,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을 돌려 찾으면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 시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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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일

             나 태 주

1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 길은 곧게 가고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사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두어 시간
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걸었으므로
만나지 못했을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나고
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
물총새, 쪽빛 날갯짓도 보았으므로

이제 날 저물려 한다
길바닥을 떠돌던 바람은 잠잠해지고
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

2
세상에 나를 던져보기로 한다
한 시간이나 두 시간

퇴근 버스를 놓친 날 아예
다음 날 차 기다리는 일을 포기해버리고
길바닥에 나를 놓아버리기로 한다

누가 나를 주워가 줄 것인가?
만약 주워가 준다면 얼마나 내가
나의 길을 줄였을 때
주위가 줄 것인가?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시험 삼아 세상 한복판에
나를 던져보기로 한다

나는 달리는 차들이 비껴가는
길바닥의 작은 돌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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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도 나태주 시인의 시였습니다. 시인은 ‘사는 일’이라는 제목으로 보통
일반사람들이 보는 시각의 사는 일이 아닌, 뭔가 계획이 틀어지고 원래 뜻했던 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일도 축복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시간에 갔건만 야속히도 먼저 출발해버린 버스 기사를, 요즘 같으면 회사 전화해서
난리를 치고 보상을 받으려고까지 하겠지만, 시인은 그냥 묵묵히 짧지도 않은 두어
시간을 땀을 흘리며 걸어갑니다. 하지만 전혀 불평불만을 토로하지 않지요.

그러하니 하늘에서 보상이 내려오는데, 싱그러운 바람을 만나고 수풀 사이에 숨어
있던 딸기도 만나며 물총새의 쪽빛 날갯짓도 만나게 됩니다.
불평과 원망을 새로운 만남의 축복으로 만들어버린 시인은 진정 이 세상을 “사는 일”
을 제대로 알고 있는 분입니다.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 2편에서는 가만히 잘 있는 나를 세상 속으로 던져보기로
합니다. 그러고는 이 세상이 이런 나를 잘 받아주는지를 시험해 봅니다.
이성적인 사람들은 정상적이지 않은 일을 벌인다고 일갈할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먼저 출발해버린 버스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만남과 훌륭한 경험을
했던 것을 되살려 의도적으로 차를 놓쳐보는 행위, 즉 세상에 나를 던져보는
일을 해봅니다.

세상사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움직일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며 우연이 난무하고 비계획적인 일이 흔하게 일어나는 곳입니다.
시인은 이런 세상을 정확히 꿰뚫고 이를 역주행으로 나아가 새로움을 도모합니다.
시인의 용기가 부럽지 않으신지요?

마지막으로 시 한편 더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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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약

               나 태 주

큰 병 얻어 중환자실에 널부러져 있을 때
아버지 절룩거리는 두 다리로 지팡이 짚고
어렵사리 면회 오시어
한 말씀, 하시었다

얘야, 너는 어려서부터 몸은 약했지만
독한 아이였다
네 독한 마음으로 부디 병을 이기고 나오너라
세상은 아직도 징글징글하도록 좋은 곳이란다

아버지 말씀이 약이 되었다
두 번째 말씀이 더욱
좋은 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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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시도 나태주 시인의 작품이었습니다. 아픈 아이를 위해 한 겨울에
빠알간 산수유 열매를 따러 다니던 젊은 아버지의 사랑을 들어본 적이 있지요.
오늘 시는 큰 병으로 중환자실에 있는 초로의 아들을 위해 면회를 온 늙은 아버지의
사랑을 이토록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시입니다.

네 독한 마음으로 부디 병을 이기고 나오너라. 세상은 아직도 징글징글하도록
좋은 곳이란다. 이 말보다 아들에게 힘이 되는 말이 없었습니다.
징글징글하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좋은 곳 보다는 안 좋은 곳을 표현할 때 더 자주
쓰지만, 징글징글하게 좋은 세상은 어디에도 없을 듯 보이지요.

늙은 아버지의 사랑 표현법은 이토록 역설적이고 깊고도 넓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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