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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Sep 07. 2016

<처음처럼>

신경림

<처음처럼>  신경림


                강 일 송


오늘은 시집 한 권을 보겠습니다.

이 시대의 존경받는 시인인 신경림(1936~)의 선집(選集)입니다.

신경림 시인이 평소 “소리내어 읽고 싶은” 시들을 골라서 모은

작품집으로 몇 편 감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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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천 (歸 天)


         천 상 병 (1930-1993)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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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의 사진을 보노라면 그의 미소가 참 해맑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고문을 당하여 육체와

정신이 멍들어 힘든 인생의 날들을 살아냅니다.

하지만 그는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으로 불릴 정도로 삶의 가난,

고통, 죽음 등을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이 시에서 그는 그토록 자신을 힘들게 하였던 이 세상을 즐거웠던

소풍이라고, 아름다웠던 곳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자식 중에 가난해 공부도 못시키고 고생만 시킨 자식이 마지막에

효도하듯이, 이 세상에서 고생만 한 시인은 끝내 이 곳을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음악이 흐르고 꽃이 피는 하늘나라에서 그는 진짜 소풍을 즐기고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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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사랑


         문 정 희 (1947~)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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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인은 빼는 법이 없습니다.  여장부처럼 단도직입적으로

치고 들어갑니다.  

그의 시는 그래서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합니다.

그의 스승 “서정주 시인”에게 대학시절 탁월한 시재(詩才)로 총애를

받았다 합니다.


“겨울 사랑”을 보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한치의 흔들림이 없습니다.

머뭇거리거나 서성거리거나 숨기는 게 없습니다.

그냥 슬그머니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눈밭에 뛰어 들 듯이

그의 생애에 몸을 던집니다.


누가 그런 그를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시 한 편을 연속으로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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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  정  희 (1947~)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란이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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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말합니다.  한계령 고개에 고립되고 싶다고.

단, 전제는 꼭 “못 잊을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고립이 눈부시다니~~

눈사태로 발만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운명까지 묶였으면 하고

애타합니다.

구조하러 온 헬리콥터에게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라 다짐도 합니다.

이 고립이 그에게는 생애 최고의 축복이리니~~


시인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향해

모든 것을 던지라고 합니다.

미적거리고 뜨뜻 미지근한 것은 참질 못합니다.


눈에 뒤덮힌 차가운 한계령과 그의 뜨거운 사랑은

한껏 대비가 되어 그 사랑을 더욱 뜨겁게 만듭니다.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너무 많이 계산하고 재면서 사는 것은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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