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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철학- 슈필라움(Spielraum)>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中

by 해헌 서재

<공간의 철학- 슈필라움(Spielraum)>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中

강 일 송

오늘은 개성이 넘치는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작가의 새로운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김정운 작가는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 심리학과
에서 디플롬,박사 과정을 하였고, 베를린자유대학교 전임강사 및 명지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습니다. 이후 그림을 배우러 일본으로 가 쿄토사가예술대학 단기대학부에서
일본화를 전공했습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여수에서 살면서 그림 그리고 글쓰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이때 썼던 글들을 모아서 책으로 엮었습니다.
저서로는 <에디톨로지>,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 <노는
만큼 성공한다> 등을 집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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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 - “라움(Raum)”

‘공간’을 뜻하는 독일어는 ‘라움(Raum)’이다. 영어로는 ‘space(공간)’, ‘room(방)’,
‘가끔은 place(장소)’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어의 ‘라움’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독일인들의 유별난 공간 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라움의 의미는 다른 단어와 연결될 때 잘 드러난다.

우선 실제 살고 있는 물리적 공간을 뜻하는 ‘본라움(Wohnraum)’이 있다.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경제학적, 심리학적 공간과 연관되는 ‘레벤스라움
(Lebensraum)’이라는 단어도 있다. ‘생활공간’ 혹은 ‘생활권’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한때 나치 시대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사용한 ‘대동아공영권’은 바로 이 ‘레벤스라움’의 번역이다.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영역을 뜻하는 ‘행위공간(Handlungsraum)’이라는
단어도 있다.

★ 한국 사회에서 부재한 “슈필라움(Spielraum)”

심리학자의 눈에는 ‘슈필라움’이라는 단어가 아주 특별하다. 흥미롭게도 독일어에만
존재하는 이 단어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놀이(Spiel)’와 ‘공간(Raum)’이 합쳐진 ‘슈필라움’은 우리말로 ‘여유 공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아이들과 관련해서는 실제 ‘놀이하는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을 뜻한다.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심리적 공간’까지 포함하는 단어다. 이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단어가 우리말에는 없다.

개념이 없다면 그 개념에 해당하는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단어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없다는 말은 그러한 공간이 아예 없거나 그러한 공간의 필요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압축 성장’을 경험한
대한민국의 사회심리학적 문제는 대부분 이 ‘슈필라움’의 부재와 아주 깊이 연관이
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심리적 여유 공간’은 물론 성찰을 위한 최소한의 ‘물리적 여유 공간’도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모두들 ‘한번 건드리기만 해봐라’ 하면서 산다. 특히 한국 사내
들에게 ‘슈필라움’의 부재로 인한 부작용은 심각하다. 여자들은 작은 화장대라도
있다. 지친 하루를 성찰하며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라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자동차만 타면 절대 안 비켜주는 거다. 남자들에게 존재가 확인되는 유일한
공간은 자동차 운전석이다. 자동차 운적석만이 내 유일한 ‘슈필라움’이라는 이야기다.
내 앞의 공간을 빼앗기는 것은 ‘내 존재’가 부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렇게 분노와 적개심에 가득 차 전전긍긍하는 거다.

★ 영역과 공간의 필요

모든 동물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고 한다. 밀집된 공간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서로 잡아먹으려고 한다. 새끼도 구별 못 한다. 심지어 자기 새끼를 잡아먹기까지
한다. 더 이상 교미도 하지 않는다.
동물행동학자 존 칼훈은 이러한 행동을 ‘행동 싱크’라고 불렀다.
‘싱크’는 음식물 쓰레기를 받는 용기처럼 온갖 쓰레기 같은 행동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 공간과 의식

아이들은 부모나 형제들로부터 독립된 ‘자기 방’이 처음 생기면 너무 행복해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자기 방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한다. 딱히 숨길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타인들로부터 방해받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슈필라움’을
지키기 위해서다. 독립된 개체로서 ‘자의식’을 공간으로 확인하려는 것이다.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공간은 이렇게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슈필라움은
바로 이 지점에 있는 단어다.

‘심리적 공간’은 ‘물리적 공간’이 확보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서구의 근대 부르주아
출현 후 생긴 가장 큰 주거상의 변화는 ‘남자의 방’의 출현이다. 취향과 관심이
공간으로 구체화되었기 때문이다. 내 실존은 ‘공간’으로 확인된다.
공간이 의식을 결정한다.

★ 나만의 슈필라움을 갖자

아무리 보잘것없이 작은 공간이라도 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한 공간,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전혀 지겹지 않은 공간, 온갖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그런 공간
이야말로 진정한 내 ‘슈필라움’이다.

오십 후반의 나이가 들어서 좌충우돌하면서 “삶이란 지극히 구체적인 공간 경험들의
앙상블”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공간이 문화’이고, ‘공간이 기억’이며, ‘공간이야말로 내 아이덴티티’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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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저자인 김정운 작가를 보고 있으면 참으로 개성이 넘치고 재능이 많은 분
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방송에서 조영남 등과 함께 <명작스캔들>을 진행
하면서 대단한 입담을 보여주었고, 교수직을 과감하게 던지고, 하고 싶었던 그림
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기까지 하였지요. 이후에 여수에 자리 잡으면서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하면서 이 책을 엮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전에 "남자의 물건"이라는 책에서도 현대 한국 남성들의 문제점을 예리
하게 분석을 했었고, 이번 책에서도 공간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인간의 심리,
현대 한국사회, 특히 남성들에 대한 탁월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공간"은 "시간"과 함께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에게 존재의 기반이 되지요.
특히 공간의 부족은 동물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어,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만드는데, 과거 흰쥐 실험을 대학때 한 적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순하던 쥐들이
좁은 공간에 있게 되었고, 다음날 아침에 찾아보니 한마리가 물려서 죽어 있었던
것을 보고 놀라움에 빠졌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를 보통 "카니발리즘"이라고 합니다.
오늘 저자도 이런 행동을 동물행동학적 용어로 "행동 싱크" 라 하네요.

현대 한국사회의 압축 성장 속에 시공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한 한국인들의
상황이 여러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저자는 진단합니다.
물론 이것만이 이유가 될 수는 없겠지만 상당히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 운전대만 잡으면 난폭해지는 심리에 대한 분석으로 탁월하다는 생각입니다.

개념이 없으면 언어가 없고 언어가 없다면 현상도 없게 되지요.
저자가 오십 후반이 되면서 깨닫게 되었다는 삶의 정의인 "삶이란 지극히 구체적
인 공간 경험들의 앙상블" 이라는 말이 상당히 가슴에 와닿습니다.
물론 공간 경험뿐 아니라 언어 경험, 시각 경험, 시간 경험 등이 더해지는 것이
맞겠지요.

공간이 의식을 정의한다는 말에서 현재 저자가 말하는 각 개인의 '슈필라움"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문화적 공감이 많이 일어났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정신과 육체가 둘이 아니듯, 물리적 공간이 확보되어야 심리적 공간도 확보되어
온 사회가 여유가 생겨 배려가 넘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