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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Mar 07. 2020

<외과의사의 등장>

“한권으로 읽은 의학콘서트”中

<외과의사의 등장>
“한권으로 읽은 의학콘서트”中

                                       강 일 송

오늘 조금 색다르게 의학에 관한 역사를 다루고 있는 흥미로운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저자는 “젊은 의학을 꾸밈하는 모임”인데 서양에서 출간된 의학과 관련된
수많은 저서와 참고자료를 통해 한국에 소개된 적이 없는 에피소드들이
가득찬 책을 만들었습니다. 여러 번의 전문가 피드백 등을 받느라 3년 6개월의
집필 기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오늘은 그중 근대적 의미의 외과의사의 등장에 관한 이야기를 보려고 합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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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과의사의 모험시대

17세기는 의학의 이론시대, 제도시대 또는 계몽시대로 불리던 시기로 병리학,
생리학 등의 개념이 대두되어 의학 전반의 학문적 역량이 강화되었다.
이에 비해 18세기는 모험적인 실험을 감행했던 외과의사들의 전성시대였다.
심지어 두개골 절개 수술을 시도해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영국의 경우 ‘이발사 외과의사 연맹’이 성립된 후 외과의사의 지위가 격상되었
지만 중유럽의 다른 국가에서는 여전히 이발사가 외과의사를 겸하고 있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발전에 발맞춰 가이 병원, 성 조지 병원, 런던 병원, 미들섹스
병원 등이 속속 등장했으며 젊은 외과의사들을 대거 기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왕실은 1745년 ‘외과학술법인단체’의 설립을 인가했다.
이는 외과의사가 드디어 수공업자 신분에서 벗어나 사회에서 존경받는 신분으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한다. 각 병원의 외과의사들은 ‘이발사 외과의사 연맹’을
탈퇴하고 모두 이 조직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각 대학과도 연합해
외과학과 관련된 특수학과를 개설토록 함으로써 직접 신진 외과의사들을
육성하게 되었다.

★ 18세기 영국 최고의 외과의사 체즐턴(1688-1752)

18세기 영국 최고의 외과의사이자 해부학교수였던 윌리엄 체즐턴은 당대의
외과학의 중흥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열다섯 살때부터 성 토마스 병원에서
외과학을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스물세 살때부터 학생들에게 해부학을 가르쳤는데, 이를 위해 런던의
사형집행인들과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매번 집으로 시체를 가져와
해부할 때 그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으며 해부할 때의 긴장과 공포를
생명에 대한 경외감으로 극복했다.

초기에 그가 집도했던 53건의 외과수술 가운데 사망자는 세 명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의 외과의사 기술로는 매우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체즐턴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져 캐롤라인 여왕(1683-1737) 시대에 궁정의사로
임명되었으며 뉴턴의 임종을 지키기도 했다.
신중함과 함께 동시에 진취성을 가졌던 그는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대담한 실험을 시도하곤 했다.

★ 신경외과의 첫 포문을 연 퍼시벌 포트(1714-1788)

체즐턴이 세상을 떠난 후, 영국 외과학에 또 한 명의 걸출한 인물이 등장했다.
인자한 품성과 뛰어난 기술로 18세기에 가장 바쁜 나날을 보냈던 외과의사,
바로 퍼시벌 포트이다. 그는 최초로 ‘이마에 생기는 종창’을 묘사해 전두부에
생기는 외상의 조속한 치료를 강조함으로써 신경외과의 포문을 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내장 탈장과 관련된 해부와 치료 경험을 토대로 과거 잘못된 이론을 모두
타파하는 열정을 보였으며 선천적으로 내장 탈장이 생길 수 있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굴뚝청소부들이 음낭암에 잘 걸린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점잖은 신사의 면모와 박학다식한 학자의 면모를 두루 갖춘 포트는 ‘의사’의
신분으로 런던의 귀족과 상류 지식사회에 융화되었다. 그리고 외과의사로서는
최초로 영국 런던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우연한 사건을 통해 외과학과 인연을 맺었다. 1756년 1월,
병원에 가기 위해 말을 타고 눈이 꽁꽁 얼어붙은 길에 나섰던 포트는 말이
빙판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의 동료들은 상처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절단 수술을 하도록
권했다. 절단톱에 기름을 칠하고 막 수술에 들어가려던 찰나, 포트의
스승이었던 너스(Nourse) 의사가 도착했다. 그는 포트의 상처난 다리를
꼼꼼히 살펴본 후 절단 수술 없이 치료가 가능하다고 판단해 포트는
다리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회복되기까지는 매우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이 기간을
이용해 골절, 종양, 척추측만과 관련된 저서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저서들은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고 있다.

지금은 오히려 병원이 외과학의 기지처럼 대변될 만큼 지위가 격상되었으며
외부 강연, 포럼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외과의사들의 메스는 여전히 환자들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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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의학의 역사와 에피소드를 다룬 책을 보았고 그중 외과의사의 등장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최근에도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가 있었고, 과거 "하얀거탑",
"종합병원" 등이 인기를 끌었지요.  미국 드라마에서도 의학 드라마는 여럿
있고 일반인들에게 생소하고 흥미로운 소재로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런 드라마를 보면 의사들 중에서도 특히 외과의사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
는데, 긴급한 수술 장면, 응급실 처치 등에서 멋진 장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외과 쪽의 학문은 아주 뒤늦게 발전을 하게 되었는데, 오늘 내용
에서도 본다면 처음에는 이발사가 외과의사 역할을 오랫동안 해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칼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이 이발사였기 때문이겠지요.

이발사와 외과의가 분리된 것은 불과 18세기에 이르러서였고, 17세기에 여러
의학의 기초 학문이 발달하면서 외과학이 독립할 기반을 닦게 됩니다.
18세기 최고의 외과의였던 체즐턴의 이야기를 보면 사형 집행인을 통해 얻게
된 시체를 해부하면서 많은 지식을 얻게 되고, 동물을 통해 수술 연습을 하고
피나는 노력을 함을 보게 됩니다.
체즐턴 이후 뛰어난 외과의였던 퍼시벌 포트는 외과의가 드디어 상류층 사회에
진입함을 보여줍니다. 런던왕립학회에 회원이 된 것이지요.

현재의 의학의 발달에는 이러한 의학의 선배들, 선구자들이 개척 정신을 가지고
해부와 실습 등 피나는 노력을 해왔던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다음에는 다른 이야기로 한번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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