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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Mar 19. 2020

<렘브란트와 네덜란드의 번영>

-“부의 지도를 바꾼 회계의 세계사”中

<렘브란트와 네덜란드의 번영>
-“부의 지도를 바꾼 회계의 세계사”中

                                        강 일 송

오늘은 금융 비즈니스의 역사에 관한 흥미로운 책을 한번 더 보려고 합니다.
현대 비즈니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회계에 관한 에피소드 들이 많이 포함된
책입니다.

저자인 다나카 야스히로(1963~)는 와세다대학 상학과를 졸업을 하였고 현재 다나카
공인회계사무소 소장이자 도쿄도립산업기술대학원대학 객원교수로 있습니다.
그는 복잡하고 어려운 회계, 재무, 경영 업무를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기로 소문난
강사이며, 주요 저서로 <실학 입문, 경영이 보이는 회계>, <좋은 가격 결정, 나쁜 가격
결정>, <숫자 1도 모르는 당신이 마케팅 천재가 되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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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앗간 집 아들’ 렘브란트

‘방앗간 집 아들이 굉장하다며.’
네덜란드의 라이덴을 방문한 미술 평론가들은 이런 소문을 들었다. 그의 이름은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1606-1669)다. 렘브란트가 태어나던 1606년 당시,
라이덴은 아직 스페인과 한창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프로테스탄트이며
어머니는 가톨릭 교도였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심각하게 대립하는 일은 없었다.

그가 태어난 지 3년 뒤, 라이덴을 포함한 북부 7주는 오랫동안 전쟁을 벌인 끝에
사실상 독립을 이루어내었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는 프로테스탄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상인의 국가’였다. 노동으로 돈을 버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가톨릭과는 달리 프로테스탄트는 일하는 것이나 돈을 버는 것을 오히려 선이라고
여겼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다수를 차지했던 칼뱅파는 ‘어떤 직업이든 신이 내려주신 것이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구원을 받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었으며, ‘상업활동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버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새롭게 등장한 의뢰인인 ‘유복한 시민’에게서 주문을 받았다.
즉, 돈을 크게 번 상인들은 화가에게 ‘초상화’를 주문했다. 유명한 화가들이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는 상인이 자신에게 수여하는 일종의 훈장이었던 모양이다.
젊은 렘브란트에게도 부유한 상인들이 꽤 많은 주문을 했고, 그는 더 큰 성공을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떠났다.

★ 암스테르담에서 발생한 장사의 선순환

유럽 전역에서 상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네덜란드에서도 특히 암스테르담은 급격하게
인구가 증가했다. 스페인과 벌인 독립전쟁에서 북부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남부는 아직
스페인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다(훗날 벨기에가 된다).
남부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상업가 기질을 가진 사람들도 모두 암스테르담으로
가기 위해서 움직였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뿐 아니라 유대교 교도들까지 공존을 허용하는 ‘관용’적인 암스
테르담에는 전 유럽에서 상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곳에는 ‘정보’도 집중되었다.
곡물, 향신료, 비단, 가죽 등을 운반하는 온갖 선박들이 상업적, 정치적인 정보를 전해
주었다. 그것은 상인들에게 무척 귀중한 정보였다.

이렇게 해서 상인들과 정보가 모이자 거기에서 수많은 거래가 이루어지고, ‘시장(마켓)’이
형성되었다. 시장이 형성되자 거래를 하기 위해 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와 같이 암스테르담에는 다른 나라에는 없던 ‘사람 -> 정보 -> 시장 -> 사람 -> …’
의 선순환이 발생했다. 이 선순환이 네덜란드 경제를 활성화시켰으며 암스테르담은
눈깜짝할 사이에 런던, 파리에 버금가는 유럽의 거대도시가 되었다.

암스테르담의 ‘시장’은 그곳에서 성립한 거래에 대해서 ‘종가’ 정보를 공표했다.
물품들이 얼마에 거래되었는지 나타내는 가격표는 상인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정보였다.
각종 거래소가 설치되고 상인들에게 ‘가격표’를 공표함으로써 암스테르담 시장의 가치는
갈수록 상승했다.

★ 그림 의뢰인과 사장이 변하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도 그의 명성은 널리 퍼졌다.
그에게 그림을 의뢰하는 이들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공방에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런 성공의 가도에 그린 그의 대표작이 바로 <야경>이다. <야경>은 경비대의 화승총
조합에게 의뢰 받은 ‘집단 초상화’다.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는 ‘미술의 상업화’를 둘러싸고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그림의 소형화’다. 네덜란드 시민들은 집에 그림을 장식하는 것을 좋아했다.
집에 장식되는 그림은 필연적으로 크기가 작아지게 마련이다. 화가들은 교회의 거대한
벽화가 아니라 시민들의 집에 거는 작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또한 그림의 주제도 신화나 성서에 나오는 장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풍경화나
꽃이나 과일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네덜란드에서는 풍경화나 정물화와 같은
‘아담한’ 새로운 장르가 나타났다.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화가가 ‘시장 거래 상품’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전까지 그림은 교회나 군주에게 주문을 받아서 그리는 그림이었는데
네덜란드에서는 시민들이 구매자가 되면서 시장 거래 상품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
옷으로 말하자면, 주문 생산에서 기성복 생산으로 전환된 꼴이다. 이렇게 되자
화가에게도 마케팅 감각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야했다.

★ 튤립 버블과 주식의 등장

이 시기에 역사에 남는 시장 거래 상품이 등장하는데 바로 튤립이다.
원래 네덜란드 사람들은 튤립으로 정원을 가꾸면서 소박한 행복을 즐기며 살았다.
그런데 라이덴 대학의 카롤루스 클루시우스 교수가 개발한 ‘희귀한 색깔’의 튤립
구근이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시장의 ‘거래조정 메커니즘’에 의해 마침내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더니 세계 최초의 버블이라고 일컬어지는 ‘튤립 버블’이 발생했다.

튤립 구근의 가격은 광란 상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
지만, 1638년 정부가 개입하고 나서 급작스럽게 가격이 폭락했고, 버블은 어느 날
갑자기 물거품처럼 꺼졌다.

네덜란드에서 튤립 버블이 발생한 후, 세계 곳곳에서 온갖 다양한 물품에 ‘버블’이
생겼다. 일본에서는 부동산, 미국에서는 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증권, 근래에 들어서는
비트코인과 같은 가상통화 등이 버블을 일으켰다. 일반적으로 버블은 클루시우스가
개발한 ‘진귀한 색깔의 튤립’과 같이 새로운 과학기술이 등장한 직후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네덜란드에는 튤립에 버금가는 붐을 일으킨 시장 거래 상품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주식’이다.
역사 교과서에 반드시 등장하는 ‘동인도 회사’가 네덜란드에 설립된 것은 1602년이다.
이 동인도회사는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라고 불린다. 이 회사의 주주는 소유한
주식을 거래소에서 매각할 수 있었다. 이 암스테르담의 거래소가 ‘세계 최초의 증권
거래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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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 시간,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공증인, 은행 반코의 시작에 대한 흥미
로운 이야기를 보았고, 오늘은 유럽의 북쪽으로 올라와 북유럽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와 주식시장 발생까지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네덜란드는 작은 나라였지만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하고, 상업을 권면했던
프로테스탄드의 영향을 받아 전 유럽에서 상인들이 몰려들어 유럽의 중심지로
거듭납니다.  특히 관용적인 정책은 프로테스탄트, 가톨릭, 유대교 등을 가리지
않아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풍부한 정보가 함께 하게
되었지요.  상인과 정보가 모이자 거래가 생겼고 결과적으로 시장이 형성되게
됩니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일 뿐 아니라 암스테르담이 국제적인
상업 도시로 성장할 때 함께 성장하여 가장 인기있는 초상화 화가이기도 했습
니다.  또한 스스로 자화상을 즐겨 그려 많은 자화상이 내려오고 있지요.
렘브란트의 시기는 그림을 주문하는 주문자가 교회나 군주에서 부유해진
시민으로 바뀐 시기였고, 이는 상업적 미술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과열된 시장은 때로는 버블을 형성하는데 최초의 버블이었던 '튤립버블'이
네덜란드에서 등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저자의 말처럼 항상 버블은 새로운 과학기술의 등장과 함께 온다고 합니다.
튤립의 개발, 증권의 등장, 비트코인의 발명 등도 마찬가지지요.

이 조그만 땅덩어리의 나라가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면서 무역을 한 역사를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 뿌리를 보면 "관용"의 정신이 이를 가능하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관용과 유연성은 편협되지 않아 다양한 사람들을 모을 수 있고, 이렇게 모인
사람들에게서 정보가 풍부해지고 이를 통해 시장이 형성되면서 경제가 발달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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