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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eping Mar 29. 2024

나는 왜 너를 사랑했는가

나는 왜 너를 길들이려 했는가

글은 물에 잠긴다. 그리 깊지는 않은 물이다. 잊어도 좋으며 가끔 꺼내봐도 좋다.

글, 모든 글은 유언이다.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전달된다.

물에 잠긴 글은 스스로 떠오를 수 없다. 하지만 그리 깊게 잠기지는 않는다.

이 글이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프게 할 의도도 없으며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그저 쓰는 것이다.


글은 비밀이다. 그것이 공개되더라도 여전히 비밀의 효력을 가진다.

나는 그곳에 살아있다. 글은 잠기되 죽지 않는다. 내가 사라져도 나의 글은 파편으로 남는다.

그 파편 속에는 나의 삶이 있다. 정지된 순간들이 그곳에 있다.


생존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다르다. 생존은 완성되지 않는 발버둥이지만  존재는 기어코 완성된다.

나는 그렇게 믿으면서 살아왔다.




선인장을 나의 방에 들여놓기 6년 전의 일이다.

작은 방 안에서 나는 누군가의 사진을 한참을 뒤적거렸다. 누구나 다시 꺼내보고 싶은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뒤적거리는 행위는 과거의 시간과 다시 조우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나온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저장'에 강박을 가지고 있었다. 손아귀에 들어온 것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들을 채워지지 않을 정도로 큰 상자에 넣는 것이 나의 일상 중 한 부분이었다. 제주도에서 주운 현무암에, 부산 영도에서 주운 몽돌에, 꽃지 해수욕장에서 주운 조개껍데기에, 강원도 산기슭에서 주운 버들잎에 이름을 붙이고 상자에 담았다.


나는 태어날 때 유독 손아귀를 꽉 쥐고 태어났다고 엄마는 말한다.

꽉 쥔 손은 다른 손에 무엇을 잡고 있을 때만 펴지곤 했다. 그리고 그 손으로 교환가치가 없는 어찌 보면 쓸모없는 것들을 잡고 이야기를 만들어줬다. 마치 자신이 소설가가 된 양 그들의 세상에 관여하곤 했다. 많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큰 상자가 필요했고 나의 작은 방은 어울리지 않는 큰 상자들로 채워지곤 했다. 그 상자는 나에게 재산이자 오만의 씨앗이었다.


작은 방에서 내가 찾고 있었던 건 지난 첫사랑의 사진이었다. 아마 그것은 그녀가 찍힌 유일한 사진일 것이다. 그리 화려한 사진도 아니었으며 같이 찍은 사진도 아니었다. 사진 속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사진을 볼 때면 현실은 저 멀리 날아가고 과거의 어린 그녀가 내게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다. 오래전 그날처럼 그녀가 내게 다가오는 듯하다.


진부한 첫사랑 얘기를 조금 적어보자면 중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와 키가 비슷한 그녀는 나와 눈을 맞추는 것을 참 좋아했다. 햇살이 좋을 때면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하루를 이야기했고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공공 도서관 로비에 앉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곤 했다. 서로가 가난했던 그곳에 그녀와 나는 값이 들지 않고 앉을 수 있는 공간만을 찾아다녔다. 용돈을 조금이라도 받은 날엔 버스를 타고 좀 더 크고 예쁜 공원에 갔다가 주변에 있는 괜찮은 분식집에 가곤 했다.


그녀와 산책을 하면서 꽃에 대해서 서서히 알아갔다. 봄에는 벚꽃이 피고 여름에는 수국이 피고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피고 겨울에는 매화꽃이 핀다. 계절마다 피는 꽃잎을 조금씩 모아서 작은 봉투에 담아서 서로에게 선물도 하곤 했다. 꽃다발을 주지 못한 이유는 가난하기 때문도 있지만 온전한 꽃을 꺾기 싫어한 그녀의 마음도 담겨있었다. 그리고 꽃다발 (꽃 한 송이마저) 도 너와 나에게는 너무 크기에 집 안에 몰래 들고 가기에는 쉽지 않았다.


그녀는 오색빛깔의 색을 가지고 있었다. 따뜻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따뜻했고 차가운 사람에게는 한없이 차가웠다. 봄이 오면 봄에 걸맞는 색의 옷을 입었고 그에 걸맞는 분위기를 풍겼다.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마찬가지였다. 여름에는 시원했으며 겨울에는 따뜻했다. 그녀는 모든 계절을 반기는 아이였으며 모든 계절에 맞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가끔 저녁에 시간이 되는 날이면 그녀와 나는 인적이 드문 초등학교로 가서 천 원짜리 폭죽에 불을 붙이곤 했다. 불꽃이 튀어 오를 때면 너는 아이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역동적인 불꽃을 몸으로 흉내냈다. 나는 순간적으로 타버리는 불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불꽃은 소유하지 못한다. 상자에 담길 수 없다. 하지만 너의 눈동자에 비치던 불꽃을 나는 오래도록 기억했다. 상자에 담을 수는 없지만 나의 기억 속에 그 장면은 정말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것들은 그 순간에 있었다. 꽃잎이 마르면 색채가 사라져 버린다. 불꽃놀이의 불꽃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이를 받아들이기 싫어했을지 모른다. 벤치에 앉아서 나누는 이야기도 그 순간을 머물다 사라진다. 그래서 나의 상자에는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신기루와 같다.


그녀와 만남을 그만둔 건 그녀를 처음 만나고 일 년 반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쉽사리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는지 나는 장문의 문자로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나는 뭐든 끌어안거나 주머니에 넣는 경향이 있었기에 그녀와 나는 어쩌면 어울리지 않았을 수 있다. 손에 든 것이 너무 많았던 나는, 아니 다시 말해 손에 들고 싶었던 것이 너무 많았던 나는 억지스럽게도 이별을 통보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 추악한 밤이었다.

산기슭에 괴물마저 나를 외면할 정도의 추악함이었다.


그녀를 사랑한 이유가 무엇이었나. 불꽃을 사랑한 그녀를 왜 나는 상자에 가두려고 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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