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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ggy pie Apr 21. 2022

언니의 결혼식

나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언니를 떠올리면 그때의 기억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밤, 우리가 깊은 잠에 빠져있는 동안 엄마 아빠가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놓아둔 선물 상자를 눈 뜨자마자 언니와 신이 난 채 포장을 마구 뜯었을 때. 젤라비 인형을 각자의 품에 안겼을 때. 각자 암바(주황색)와 코코(분홍색)를 탐내지 않고 마음에 쏙 들어했던 그때의 귀여운 행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어렸을 땐 원수나 다름없던 자매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언제 그랬냐는 듯 둘도 없는 사이좋은 자매가 되었다. 물론 지금도 한 번씩 서로의 심기를 건드리면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있긴 하다.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물건을 공유하고 (사실 압도적으로 언니 물건이 많고 질이 좋아서 hoooray!) 카페나 맛집을 함께 찾아다니고 종종 여행도 다니면서 평생 옆에 붙어있을 줄 알았던 나의 언니가 결혼을 한다고 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나는 곧 한국을 떠나게 될 테니까 아쉬움을 뒤로 한채 그냥 가족이 한 명 더 생기는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게다가 싱가포르에 오기 전부터 입사날짜와 애매해진 언니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나에겐 언니와 두 명의 남동생이 있다.

원래의 기억 속에선 언니 나 남동생 이렇게 세 남매였지만(?)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싱가포르로 가족여행을 온 적이 있는데 사랑 넘치는 부모님이 여기서 남동생을 하나 더 만들어 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언니가 대학생이 될 무렵, 내가 고등학생이 될 때쯤, 남동생이 초등학생일 때, 늦둥이 막내 동생이 태어났다.


그래서 처제에게 온갖 뇌물공세와 노력으로 일찍이 친해진 형부와 언니가 서운해할지라도 우린 대가족이니까 나 하나쯤 빠져도 여전히 북적북적할 테니까 괜찮겠지 싶었다.


언니의 웨딩데이


언니의 결혼식날

결국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참석하지 못했다.

너무 미안하고 많이 아쉽고 속상하면서도 결혼식 때 찍은 내가 없는 가족사진을 보면서 두고두고 후회할 테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충분히 축하해준 걸로...


언니의 근사한 결혼식이 있던 당일 나는 생각보다 훨씬 외롭고 슬펐다.

시차는 싱가포르의 시간이 한국보다 1시간가량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한 시간을 앞서고 있는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큰 기쁨을 나누고 있는데 나만 혼자 시간이 멈춰있는 것처럼 덩그러니 놓여있는 기분이었다. 싱가포르 어느 집의 작은 직사각형 방안 침대에 누워있는 내 모습이 너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처한 이 상황에 대해 원망하거나 후회한 적은 없다

이것조차 결국 내가 선택한 일이고, 그에 따른 책임과 후회도 나의 몫이었으니까.

 

내가 참석하지 못한 언니 결혼식에 그 당시 남자친구가 가서 축하해주었고, 페이스타임을 통해서 결혼식 라이브를 멀리서나마 지켜볼 수 있었다.

그 이후 멕시코에 도착한 언니와 마주 보고 대화하듯 한참을 통화하다가 휴대폰이 폭발할 것 같아 아쉽게 끊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없는 우리 가족 행사에 본인이 나를 대신해 마음을 전해주고 싶다며 직접 찾아가 준 그에게 지금도 무척 고맙다.

재밌는 건 친언니의 결혼식엔 못 갔지만 당시 남자친구의 누나 결혼식엔 참석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언니는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동생에게 서운한 건지 이런 동생은 나밖에 없을 거라며 두고두고 우려먹는 중이다. 내가 언젠가 결혼이란 걸 한다면 본인은 그때 해외여행 중일 거라며 진심 반 장난을 치곤 한다.


사랑도 기회도

타이밍이 중요한 건 사실이겠지 뭐든!


칸쿤에서 보내온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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