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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ggy pie Aug 14. 2022

나는 생각보다 강하다

그리고 배운 것들


모두가 그렇듯 삶이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우리는 배우고 성장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1. 베드 버그 어택을 당한 이후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씻고 나를 다시 되살리기 위해 애썼다.

이 머나먼 타국까지 날아와서 주저앉아 울고만 있을 순 없었으니까.


나의 안쓰러운 모습을 본 동료들이 하나 둘 따듯한 마음과 손을 내밀어주었다. 고맙게도 주변 사람들 덕분에 훨씬 더 깊고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매니저가 끔찍이도 아끼던 크루 조이스는 내가 끼니도 챙겨 먹지 않는 걸 어떻게 알고 집까지 음식을 배달해주며 진심으로 나의 쾌유를 바라 주었다.

또 당시 나와 함께 지내게 된 하우스메이트 J와 L의 보살핌을 받으며 그들에게 유대감을 느끼기도 했으며, 함께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공유하며 서로에 의지하기도 했다.

첫 진료 날 동행해준 친구에게도, 바르는 약과 위로의 말을 건네준 동료들도, 멀리서 나를 위해 매일같이 기도하며 스스로 일어나는 방법을 배우길 바랐을 부모님에게도 그리고 나에게 시련을 주시고도 나를 지켜주신 하나님께도 감사하다.

이 모든 과정 가운데 상대방의 말과 행동 속에서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또 다른 배움과 지혜를 얻기도 했고,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베드 버그를 겪은 나의 루틴은 하루 두 번 샤워 후 온몸에 약을 덕지덕지 바르고 손톱을 항상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불필요한 결벽증이 생긴 건지 손을 너무 자주 씻게 되었고 손톱이 조금만 길어도 거슬려 짧게 정리하고 종종 즐겨 받던 네일아트나 미용에 대한 관심도 없어졌다. (정말 기분을 내고 싶을 때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할까 말까 한다) 그렇게 나의 몸이 예전처럼 돌아오기까지 4개월가량이 걸린 것 같다.




2. 매니저는 나에게 잠깐 이야기를 하자며 불렀고, 자초지종 설명 없이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사과를 하며 갑자기 눈물을 내보였다.

매니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가 입사하기 직전까지 동일한 포지션에 들어오던 사람들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하나같이 힘들다는 이유로 곧장 그만두었다고 한다. 매니저 입장에서는 신입들에게 공들여서 업무 인수인계를 했더니 모조리 바로 나가버리는 상황에 지칠 때로 지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으로 들어온 신입(나)에게도 자연스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애초에 정을 주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던 와중 나와 면담했던 부장님께 (상황에 대한 내 입장) 이야기를 듣고 나니 본인의 섣부른 판단이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며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줘서 고마웠다.

나도 예의 없이 소리 지른 것에 대해 사과드렸고 그렇게 우리는 언니(매니저)와 아가(나) 사이가 되었다.

본연의 인간적인 모습을 알고 나니 나보다 열 살가량 나이가 많았지만 거리낌 없이 다가갈 수 있었고 매니저는 생각보다 훨씬 멋지고 시크한 사람이었다. 프랑스와 미국에서 언어를 배우고 각 도시에서 수년간 커리어를 쌓고 싱가포르로 돌아온 매니저의 폭넓은 지식과 다양한 시각을 닮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배울 점이 많아 존경스러웠다. 심지어 예상치도 못한 귀여운 애교까지.. 덕분에 첫인상이 중요하지만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내 주변엔 볼 수록 매력적인 진국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3. 불행 중 다행히도 한국에서 부모님이 퇴원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럼에도 부모님이 탑승 중이던 차를 뒤에서 돌진해 사고를 낸 사람이 너무 미웠지만 그 마음도 점차 흐려졌다.

매일 밤 제 기도에 응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4. 나는 결코 인종차별을 하지 않았으나

나중이 되어서야 밝혀진 해프닝이지만 내가 필리피노인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껴 다른 필리피노 동료들에게 와전된 이야기로 오해가 생겼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겐 그럴만한 의도와 악의가 없었지만 해당 필리피노 동료는 나와 직접적인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나의 온 신경이 stressful 한 모습(배드 버그와 부모님의 사고, 한 싱가포리안의 스토킹, 매니저와의 갈등이 최고조로 올랐을 때의 시점)을 보고 오해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 됐건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인종차별을 하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감히 하나의 소중한 인격체를 무시할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그저 무지한 존재들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인종차별이란 단어가 참으로 씁쓸하다.


필리핀 클락으로 어학연수를 갔던 스무 살 때부터 나는 나와 비슷하게 생긴 마리, 산토스, 다이애나, 릴린 선생님에게 친밀감을 느꼈고 너무 애정 했기 때문에 필리피노의 달콤한 향기와 포근한 정을 사랑하게 되었다.

대학교에서 함께 일해왔던 원어민 교수님 제리와 미치 선생님과도 진득한 우정과 정이 쌓여 현재까지도 종종 연락하며 기약 없는 약속만 늘여놓고 있다.

이처럼 필리핀의 그녀들과 처음으로 흥미로운 1:1 영어수업을 했고, 시간이 흘러 함께 일을 하며 삶의 일부를 함께 나누기도 했다.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 나의 전화영어 수업을 담당하는 롯 티처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만나면 반가울 랜선 친구가 되었다.


이후 나에 대한 오해를 풀어 필리피노 동료들과 싱가포리안 동료들 모두 가족처럼 절친하게 지내올 수 있었다.



 5. 싱가포르에서 정크푸드만 찾던 습관을 버리기로 했다.

다양한 문화와 음식을 자랑하는 싱가포르에서 입맛이 까다로운 줄 알았던 나는 한때 패스트푸드나 한식만 찾았다. 하지만 현지 친구들이 데려가 준 뉴턴의 로컬 맛집들과 푸드 리퍼블릭의 음식들을 맛 본 이후 바보같이 나는 왜 이유 없이 로컬 음식에 거부감이 들었까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저녁이 되면 라우 파 삿 사테거리에서 여럿 음식들과 맥주 한 잔이 삶의 낙이 되어주기도 했는데 말이다.


라우파삿 사테거리


역류성 식도염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영양가 있는 음식을 챙겨 먹기 시작했고 거의 매일같이 생강차 한 잔씩은 꼭 마시게 되었다.

그리고 식사 후 최소 두 시간 이후에 눕는 (강박을 가진) 습관도 생겼다.  

병원에서 받던 치료 없이도 건강의 중요성을 느껴 자연스레 내 몸에 불필요한 요소를 걸러내다 보니 불편한 증상이 점차 사라지고 몸이 한결 가벼워질 수 있었다.  



6. 마감업무를 하며 데일리 업무의 일부를 카톡으로 일일이 보고해야 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과장님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있었다.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결국엔 사고를 쳤다.


업무를 마무리하고 퇴근 준비를 하는 동안 직장동료인 조이스와 장난을 치며 서로 손가락 욕 사진을 찍어둔 게 있었는데 신명나게 웃고 떠들던 사이에

(손가락이 미끄러져 그만..) 문제의 손가락 욕이 담긴 사진을 과장에게 실수로 잘못 보낸 것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22살의 나는 정말 천방지축이 맞았다...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 상황이었다.

순간 얼음처럼 굳어진 나와 조이스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뒷수습을 어떻게 처리할지 재빨리 보내야 할 답장을 생각해내야 했다. 사실상 카톡은 내가 보낸 것이니 조이스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상황이 맞다.

내심 속이 시원했으나 심장이 쫄깃하고 이 상황이 싫으면서도 웃겼다.

만약 내가 상사였더라면 경우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했을까?


곧이어 사진을 확인한 1이 없어지고

"?" 이렇게 답장이 왔다.

짧고 굵은 고민 끝에 변명 따위도 없이

"죄송합니다 과장님"이라고 보냈다.

그랬더니 "ㅋㅋ"과 함께 어이없는데 웃기다는 식의 예상치도 못한 답장이 왔다.

뒤늦게 과장님께 잘못 보낸 사진이라고 덧붙이며 다시 한번 죄송하다고 보냈다.

"잘못 보낸 건 알겠고 지금껏 내가 재수 없어서 보낸 건 진심인 걸로 알고 있겠다"며 꽤나 유쾌하게 넘어가 주시려는 것이다.

다음 날 과장님께 찾아가 한번 더 사과드리고 가벼운 면담과 함께 꽤나 무거운 업무를 처리해야 했지만 이마저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후에도 몇 차례의 크고 작은 갈등이 부딪히긴 했지만 적어도 이 사람에 대한 프레임을 씌우지 않고 대할 수 있게 되었다.



7. 자격지심은 현재 본인의 모습에 부족함을 느끼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자존감과 자신감이 상실되는 듯한 시기를 겪는 법이다.


이 시기에 나는 여러 일들을 겪으며 자존감이 바닥났고, 그 와중에 들려온 동기의 취업 소식마저 배 아파한 못난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만족하지 못한 당시의 내 모습과 비교하며 자격지심이 생기기도 했다.

이런 나의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 시기를 잘 극복해 나를 다시 되찾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아주 많이 가지게 되었다.

나 자신이 가치 있고 소중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나는 다시 열정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싱가포르에서 일하고 있는 내 모습이 멋지게 보였고 내 삶이 너무나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와 함께 꿈꾸던 회사의 최종 합격 소식을 알려 주었는데 그 누구보다도 기뻤다. 친구가 합격했다는 사실도 기뻤고 내가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있다는 사실도 기뻤다. 기쁜 동시에 부러운 마음도 컸지만 시기나 질투의 부러움이 아니었다. '나도 함께 꿈을 이루었다면'의 아쉬운 마음에서 나오는 부러움 뿐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친구의 노력은 내가 한 노력의 배가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도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결국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개척해 나아가고 있고 이런 나 자신이 좋다.  

마음속에 여유를 가지고 모든 일을 나에게 포커스를 맞춘다면 자존감과 자신감은 나를 믿고 따라와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모두가 사회의 기준 또는 다른 사람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위한 삶을 살며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퇴근길 오차드로드에서 발견한 무지개



순조롭기만 한 줄 알았던 내 생활이 하나둘씩 꼬이기 시작했고, 일이 닥칠 때마다 지금 당장의 눈앞이 막막하고 이 문제가 영영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돌아가지 않았고 내가 마주한 이 상황들을 피하지 않고 직접 부딪히며 정면 승부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더 단단해질 수 있었던 값진 경험이 되지 않았을까.








거친 파도가 요동치고 난 뒤 고요히 찾아온 잔물결처럼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던 폭풍우가 찾아온 후 느꼈던 잔잔한 감정들이 꽤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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