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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빽언니 Jun 06. 2019

늙었다고 다 용서가 되는 건가?

타인의 삶의 무게


며느리에게는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부모라는 분들과의 인간관계가 시작되는 경우가 100%다. 어린 시절부터 그들의 며느리로서 길러진 것이 아니다. 즉, 서로의 삶의 무게를 모르는 사이라는 거다. 난 결혼을 했다고 그 집안에 들어갔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지만, 결혼을 했기 때문에 내가 번 돈까지 시가로 포함된다는 생각을 한 순간도 해 본 적이 없다. 


며느리라는 타이틀이 생긴 후에도 나에게는, 아들의 사업자금을 도우려고 보증을 서다가 재산을 잃은 가난한 친정부모가 항상 마음에 걸렸다. 가난한 친정 때문에 더욱 돈을 더 벌어서 나라도 내 부모에게 도움을 주거나 짐이 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오래전일이다. 작은 사업으로 돈을 조금씩 벌고 있을 때, 나와 남편은 동시에 의정부 호원동 망월사역 바로 앞에 있는 엘리시움이라는 주상복합 아파트를 하나씩 분양받게 되었다. 친정엄마가 대신 추첨을 해 주었는데 희한하게도 부부가 둘 다 당첨이 된 거다. 7000만 원 정도 시세의 원룸이기 때문에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고,  추후에 발생하는 중도금은 시간차를 두고 갚아나가는 비용이라 우리의 벌이로 감당할 수 있었다. 30대 중반에 생애최초로  우리의 힘으로 사게 된 집이라 기뻤고 가격이 저렴한 작은 아파트라 세도 잘 나간다고 해서 월세를 받는 집주인이 된다는 기쁨으로 투자라는 걸 처음 해 본 것이다.  


내 신분증은 친정엄마에게 맡겼고, 남편의 신분증은 한국의 시아버지에게 있다고 해서 두 분은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지하철역에서 나의 친정엄마를 만나서 남편(시아버지의 아들)의 주민등록증을 건네 주기로 해 놓고도 시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가난한 친정엄마가 신분증 가지고 뭔가 장난을 할 것 같아서, 아무에게나 신분증을 줄 수 없어서, 믿을 수 없어서 그랬다는 게 나중에 들은 그 이유다.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주민등록증만을 사용하고 그 날 바로 돌려주기로 했는데도 말이다.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그 아들은 귀한 자식이고 난 귀하지 못한 딸이라 내 엄마는 딸과 사위의 신분증으로 헛짓거리를 할 거라는 상상도 무서웠다. 오히려 아내인 내 입장에서 내 남편의 신분증을 들고 뭐를 하는 건지 모르겠으니 돌려달라고 주장하면 줘야 할 판인데, 아들의 신분증이라고 자신들이 꼭 쥐고 있어야 한다는 발상이 기가 막혔다. 


늙었으면 지 맘대로 해도 다 용서가 되는 건가? 


시아버지의 태도와 행각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네가 우리 집안에 들어와서 한 게 뭐냐?' 고 하던 시아버지는 아들의 신분증을 쥐고 흔들며 아들 부부의 재테크도 참견하는 웃기는 꼰대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나와 내 남편이 결정해서 한 일도 시아버지가 신분증을 주지 않는 바람에 뭘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따졌지만 그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아들의 신분증은 자신이 지킨다는 신조를 버리지 않았다. 


가난했지만 내 어머니는 몸을 움직이고 시간을 써서 딸 부부를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는데. 돈 없는 사돈이라고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랬을까 싶어서 난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 당시는 지금과 달라서 현장에서 포기할 경우 이 백만 원 정도 웃돈을 받고 당첨권을 파는 게 가능해서 우리는 남편의 당첨분을 어쩔 수 없이 팔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난 이백만 원을 모두 그 날 오만하고 비겁한 사돈으로부터 영문도 모르게 수모를 당한 엄마에게 쓰시라고 드렸다. 돈으로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그게 아니다. 


나이가 들면 자식에게 자식의 짐의 무게를 덜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나에게 가난한 친정은 소중하고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건 시가의 태도였다. 시가의 돈을 뜯어다가 친정을 먹여 살리는 것도 아닌데 십 원짜리 한 장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친정 먹여 살릴까 봐 전전긍긍하며 재산형성을 방해하는 시부모도 직접적으로 엄청난 짐이 되는 건 마찬가지다.  


누구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이 세상에 와서 사는 시간의 양이라는 건 아무리 길어서 100년이다. 모두가 한정적인 시한부 인생이다. 젊을 때 잘 살아야 늙어서 그 결과가 나오는 것 같다. 멋지게 나이 먹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타인의 고충을, 삶의 무게를 이해한다는 점이다. 


자식이 결혼을 해서 가장이 되어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데도 그 자식을 미성년자 다루듯이  재테크의 방향까지 좌지우지하려는 부모의 초라한 모습이야 말로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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