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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빽언니 Jun 10. 2019

숙주와 기생충

고1 때 내 짝꿍이었던 영혜는 말 그대로 교실에서 내 옆자리에 앉았던 짝이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

선을 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들뜬 목소리로

국제전화를 한 영혜는 남편감이 어떤 사람이냐는 내 말에


 "우리 집 보다 백배 부자야"라고 남편을 소개했다


 딸을 연거푸 둘을 낳고 너는 처음부터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넌 내 심정을 모른다고 몇 번 토로하던 영혜가 셋째로

아들을 낳았을 때는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 아들을 낳은 기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래간만에 만난 영혜는 결혼 선배로서 외동 하나 달랑 낳고 멈춘 나보다

자식을 세 배나 많이 낳은 사람답게 이것저것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이 바보야 네가 집 산 걸 시엄마한테 왜 말해?.

그런 거 없는 척해야 나중에 더 주지시누이도 있다면서?

그 애도 아마 지 부모한테서 콩고물 떨어질 거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릴 텐데.

너네 너무 많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이거나 부동산이 늘어난 걸 알면

니 신랑에게 다 주려다가도 생각을 좀 하게 되지 않겠니?……."


제대로 뇌리에 꽂히게 알려줘야겠다는 강한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영혜는 나에게 조언을 해 줬다.

 

ㅋㅋㅋ재산 더 많이 물려받으려면 집도 사지 말고 재테크도 안 한 척하라고?"


고교시절 우리 학교에서 두 번째로 뚱뚱했던 영혜는

어느 날부터인가 자율학습시간에 무조건 빠지고 악기를 배우러 갔었다.


영혜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다 가시면서

교장선생님이나 음악 선생님에게 잘 부탁을 드리고 간 모양인지

고등학생인데도 공부는커녕 학급 교실에서 벗어나서

방음이 잘 되어 있는 음악실에서 혼자서 몇 시간이고 연습을 하곤 했다.

무척 유명한 교수에게 비싼 레슨을 받으러 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고교 3년을 보내고 영혜는 최고로 유명한 여대의 음대에 진학하고,

의술의 힘을 빌려 외모부터 환골 탈태하더니

음대를 간 것은 선을 보기 위한 워밍업이었을 뿐이라고 보일 정도로

음악과는 거리를 두더니 졸업 후에는 날이면 날마다 맞선을 보러 다녔다.


어찌 됐던 내 짝꿍 영혜는 결국 백배나 부자인 부잣집 큰아들이랑 결혼을 했고

딸 딸 그리고 아들을 낳아 얼굴이 활짝 폈다.


자기는 무슨 복인지 너무 시집을 잘 갔다고

본인 입으로 자화자찬을 하기도 할 정도로 결혼에 만족하며 자랑스러워했다.

결혼하고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렇게 자신의 결혼 자체를 만족하며 좋아하는 여자를

별로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좀 이해가 안 가기도 했지만행복이 전파되듯 나도 좋았다


영혜는 시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는 어디쯤인지,

어디까지가 의무이고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지를

항상 계산하면서 잘 살고 있는 듯했다.


나에게도 일단 없는 척하고 시부모가 가진 것을 가능하면

많이 받아내려면 너무 있는 그대로 다 보일 필요가 없다는 논리를 폈다.


결혼하자마자 아파트에 건물에 부모로부터 엄청 받았지만,

장남인 자기 남편은 매주에 부모님 댁에 갈 때마다 어머니에게

용돈을 달라고 응석을 부린다고 한다또 시어머니는 그 응석을 좋아하신다고 한다.


거기까지만 듣고 난 그들을 기생충과 뭐 별만 다를 바가 없다고까지 생각하기도 했다.


그만큼 받았으면 됐지 다 큰 자식들이 욕심은……

아마 좀 부러워하다가 질투하다가

그래도 안 되겠으니까 소심하게 기생충에 비유하는 하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는 숙주자식은 기생충

숙주에게 기생충이란 뭘까?


기생충은 숙주에게 들러붙어서 영양분을 빨아먹어야 살아갈 수 있다.

기생충은 서로 -다른 종-의 생명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공생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이득을 취한다.


그 기간이 길 수도 있고 일시적일 수도 있지만,

기생충은 일단은 세균이나 바이러스와는 다르게

독립적으로 핵막이 있어서 숙주를 옮겨 다닐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요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빈대 같은 것도 기생충인 셈이다.


그러나 기생충학자 서민 교수의 글을 보면,

열 달 동안 엄마 뱃속에서 숙주인 엄마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숙주의 영양분을 뺏어먹고 숙주에게 피해를 주며 자라는

태아는 -같은 종-인 호모 사피엔스라는 점에서 기생충으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한다.


<서로 다른 생물체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기준에 어긋나기 때문이란다.


그에 따르면,


기생충을 탐욕의 상징에 비유한 것도 잘못됐다.
기생충은 언제나 먹을 만큼만 먹는다.
세상에 뚱뚱한 사람은 있어도 뚱뚱한 기생충은 없다.
대식가의 몸에 있던 회충도 채식주의자의 몸에 있던 회충처럼 길고 가늘다.
왜? 자기 분수를 지켜서 먹으니까.
그게 숙주가 잘 먹어야 자신이 편하니까 그러는 것일지라도,
기생충을 탐욕의 상징으로 부를 수 있을지는 망설여진다.
기생충은 비열할 수는 있어도 탐욕스럽지는 않다
있는 듯 없는 듯 숨은 채로 자기 먹을 것만 챙겨 먹는 놈들, 그게 기생충이다.


 영화 에일리언을 보면,

에일리언이 낳은 수많은 알은 유충 상태로

인간의 입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가서 발육하고

사람의 몸속에서 자라서는 가슴을 찢고 나온다,


중간숙주로서 다 자랄 때까지 인간을 이용하고 나서는

인간의 몸에서 나와 자유생활을 하며 인간을 괴롭힌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독립적으로 날뛰며

뱃속에서 키워 준 은공도 모르고 기고만장 별 괴물 짓을 다 한다.

기생충의 자격을 얻으려면 반드시 다른 생물체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데

인간과 태아는 서로 <같은 생물체>라 기생 관계가 아니라고 한다지만

그런 생물학적인 정의만 뺀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기생충과 숙주 관계와 같다고 생각된다.

꼭 하는 짓이 부모 자식 관계 같다.


그런데 그 시어머니가 환갑에 가까이 가고 있는 아들이

용돈 달라며 재롱떠는 모습을 배꼽 빠지듯이 웃으시면서

너무 좋아하신다는 거다.

 

문제는 이 부모라는 인간 중간숙주들이

이 자식이란 기생충들을 너무 예뻐한다는 거다

이 기생충들을 <인생 최고의 선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거다 


계속 영양분을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숙주를 완전히 벗어날

만반의 태세가 다 되어 있거나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기생충들에게 조차

계속 숙주노릇 하고 싶어서 따라다니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쯤대면 전세는 역전인 셈이다.

어여쁜 기생충들에게 홀려서 몸도 주고 마음도 주다가

기생충들에게 무시당한 숙주는

섭섭하다고 가끔 찔찔거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멈추지 못하고

계속 허전한 마음을 자식에게 기생시키는 <마음 기생충>이 되는 거다.


빼앗기는 것에 익숙해지고 그것이 마냥 기뻤던 중간숙주들은

점점 성충이 되어 독립해 버린 기생충들에게

마음을 기생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숙주는 자신이 이제 기생충이 된 걸 깨닫지도 못하기도 한다.


내 기생충에게 뭐 더 해 줄 거 없나 눈에 불을 켜고,

내가 아직 더 필요하지 않느냐고?

너희의 숙주노릇을 할 능력이 아직도 있지 않느냐고?


애틋하게도

못 사는 중간숙주잘 사는 중간숙주에게 다 비슷한 증상이 있다



배가 아프면 기생충임을 의심하고 약을 먹고 박멸할 수 있다.

그러나 별 증상 못 느끼고 살던 중간숙주들은 기생충 박멸이 어렵다

오래도록 더불어 살았기에 박멸하고 싶지도 않다.

더 주지 못해서 안타깝고 미안해서 미치겠다.


AI니 4차 산업이니 뭐니 엄청난 발달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기생충들이 주는 즐거움기쁨을 그 어느 인공지능로봇이 대신해 줄까?


그렇다생각해보니 그런 거였다.


중간숙주인 부모가 아무리 온전한 덩어리가 되어도 결국 기생할 곳은 자식이다.

자기도 모르게 기생충에게 마음을 기생시키고 있었던 부모.


부모와 자식,

자세히 보면 자식과 부모는 서로 기생충이자 숙주이다.


이 관계에서의 기생충 박멸이란 불가능하다

숙주가 생을 마감해야만 완벽한 박멸이 가능해지는 것일 뿐

잘 뜯어먹는 자식들은 그 기술 하나만으로 부모를 항상 기쁘게 하고 있었다.


나도 기생충이다.

난 좀 다른 기생충인 척했을 뿐 숙주의 마음도 모르는 바보 기생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잘 받아먹는 자식이 부모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몰랐다

고맙게도 영혜에게 배운 게 있다.


몇 십억을 물려받고도 자주 용돈을 받아오는 영혜부부를 보고,

시부모의 재산을 더 물려받기 위해서는 없는 척을 좀 해야 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난 멋진 기생충이 되기로 했다.

이제 친정엄마가 싸 주는 김치나 반찬을 사 먹으면 된다고

귀찮다고 무겁다고 안 가져오는 짓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촌스러운 옷을 사다 줄 때도

행여 그 옷을 절대 입지 않을지언정

일단 엄마 앞에서는 잘 받아주는 딸이 되기로 했다.


사위나 외손자의 보약,

가끔 딸인 나를 위한 보약이라고 무작정 사다가 놓고 가실 때마다,

그거 다 내가 준 돈으로 사는 거면서 쓸데없이 돈 쓴다고

툴툴대고 짜증 내던 내 모습이 얼마나 엄마를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거 봐 나 아니면 이걸 누가 해 주냐너는 아직도 내가 필요해"


없는 돈 모아서 딸 보약 지어다 두고 의기양양한 엄마가 계속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생을 마감할 때까지 난 엄마의 양분을 쪽쪽 다 빨아먹는 기생충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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