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빽언니 Jun 04. 2019

네가 우리 집안에 와서 한 게 뭐냐?

며느리는 천년 손님

' 네가 우리 집안에 들어와서 한 게 뭐냐?


시아버지가 던진 이 말에 나는 여태까지 시아버지라는 한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시아버지는 평생 서울의 한 사립대학의 교수로 일하다가 정년퇴임을 한 분으로 , 젊은 시절인 60년대 말부터 유럽에서 박사까지 공부했다. 선진국에서 선진학문을 공부한 그도 나에게 '우리 집안에 들어왔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나더러 우리 집안에 들어와서 한 게 뭐냐고 다그쳤다.


'내가 그 집안에 들어갔나?'

'난 결혼을 했을 뿐인데'

'내가 뭘 더 해야 하지?'


나는 결혼을 했지 시가의 집 안에 들어간 적이 없다. 내가 그곳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건 시가의 착각일 뿐 내 생각은 아니다.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와 결혼을 해서 자신의 가정을 꾸렸을 때, 그 남자가 바로 내 아들일 때 생기는 인간관계의 대상을 며느리라 한다. 나는 며느리라고 지칭되는 입장이다. 어떤 의 아들과 결혼을 했기 때문에 붙은 타이틀이다. 그건 자식을 낳으면 엄마라고 불리고 아빠라고 불리는 것처럼 자동으로 붙는 타이틀일 뿐이지 신분계급이 아니다. 남편의 원가족 가정에 신입사원이 된 것도 아니다.


' 네가 우리 집안에 들어와서 한 게 뭐냐?


라는 말은 며느리사람은  가정을 위해 뭔가 기여해한다는 전제가 붙어 있다


며느리는 내 아들과 한 가정을 이루사는 사람으로 결혼이라는 사회적인 제도를 통해서 내 아들과 가족이 되지 않았다면 전혀 만날 일도 없을지도 모르는 완전한 남이다.  며느리는 아들의 아내일 뿐 시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런데 내 아들과 결혼한 여성을 일컫는 말이면서도 단순히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엄청난 무게를 짊어지게 하는 부담을 느끼게 한다. 결혼을 하고 나면 며느리들이 수 없이 듣는 말이 있다. '넌 이제 우리 가족' , ' 네가 우리 집에 시집와서 할 일이 뭔지 알아야 한다' , '며느리의 도리를 다 해라'라는 얘기들이다.


남남이었던 사람들이 '결혼'했다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가족이라고 다가와서는 한꺼번에 그놈의 '집안의 가풍'을 가르치려 들기 시작한다.


딸은 퐁당퐁당 말대꾸해도 되면서, 며느리는 의견만 말했을 뿐인데도 시엄마는 과민 반응하며 머리 싸매기 시작한다.  내 의견을 말해도 말대꾸가 된다. 시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 싹수없다는 꾸지람도 서슴지 않고 해도 된다는 권한이라도 부여받은 듯이 함부로 대한다.


그들에게 그런 권한은 누가 준 것일까? 나를 막 대해도 된다는 권한 말이다. 경우에 따라서, 필요할 때마다 시가를 중심으로 가풍이라며 며느리만 소모된다.


시부모의 생일을, 시누이의 생일을 알아줘야 하고, 심하게는 시누이 남편의 생일까지도 챙겨야 한다. '가족이니까'라는 명분인데 '가족이라면서' 정작 시누이 남편은 며느리의 생일을 챙기지 않아도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여러 가지 개떡 같은 굴레를 씌우고, 의무의 사슬로 엮어버리는 관습은 며느리에게는 심한 스트레스가 되다가 심지어는 트라우마 되어 자신이 시엄마가 되면 그대로 다음 세대의 며느리에게 발산을 한다. 그래야 그 트라우마가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걸까.


집구석 내에서 가족끼리 기분 나쁘게, 사소하지만 부당하게 벌어지는 자잘한 인격모독을 당해도 '미투'를 하기도 애매하고 쪽팔린다.  타인에게 성희롱당하면 '미투' 하면서 공감을 얻고 가해자를 망신 줄 수도 있지만, 시가에서 받은 인격모독은 집안일이라 누워서 침 뱉는 것 같아서 어디에 하소연하기도 쉽지 않다.  그건 마치 방음이 잘 된 방에 갇혀서 집단 폭행당하면서도 그 절규가 새어 나가지 않을 때 드는 처절한 기분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일상 속에서 쌓인 울분은 오래간다. 아주 아주 오래간다.  며느리가 나이 들어 시엄마가 돼도  상처는 치료되지도 않고, 잊히지도 않기 때문에 자다가도 가슴 저 바닥으로부터 울컥하고 올라온다. 통찰 없고 인내 없이는 그대로 요실금 지리듯이 행동으로 나온다. 자신의 며느리에게 자신이 당한 일을 그대로 한다. 해독되지 않은 독을 다시 뿜어내는 거다.  


'나는 기분 나쁜 시집살이 했지만 내 며느리와는 잘 지내야지 결심했다'고 며느리와 아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입으로 선언했다해도 말처럼 되지 않는다. 부당한 대접을 당한 대로 그대로 한다. 참지 못하고 배설하듯이, 토하듯이 내뿜어서 아들의 아내인 며느리에게  ' 괜히 기분 나쁜 시집살이'를 옴팡 다시 뒤집어 씌우는 악순환을 벌인다. 


내 시엄마도 그런 모습을 보였다. 항상 시엄마로부터 '이 집에서 나가', '너 같이 멍청한 예수쟁이가 며느리이기 때문에 내 아들이 출세도 못한다'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던 그녀는 나가면 갈 곳이 없었기에 그 수모를 겪으며 살았다고 했다. 그럴 때 자신보다 어머니 편을 들었던 남편이 여전히 야속했다고 했다.


그런데 결혼초 시엄마가 나에게 해 줬던 그 얘기 속의 구박받던 애틋한 주인공은 어느덧 나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나가라'는 시엄마의 변덕과 명령에 여러 번 나가 줘야 했다. 같이 살지도 않는 며느리로서 가끔 한국에 가는 기간에 며칠 머무는 동안에도 시엄마는 상처치료를 위해 울분을 발산할 기회를 만난 사람처럼 나에게 상처를 주려 애썼다.


며느리도 가족이라며?

부당한 시집살이 힘들었다며?


남편의 부모라는 그들이 내게 하던 행동들은 심하게 정 떨어진다. 그들과의 접점은 남편 하나일 뿐인데, 남편 하나 생기고 이렇게 기분 나쁜 인간관계가 따라오다니.... 남편을 조속히 반품해야 이런 모욕적인 대우를 안 받을 수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었다.


이 관계는 마치, 흑인은 무조건 노예가 되던 그 옛날 미국 대륙에서 살던 흑인들이 흑인이 아닐 수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무조건 학대당했던 시절을 떠 올리게 될 정도다.


위기의식을 느꼈다.

난 더 이상 그런 대접은 받지 않기로 했다.

내가 부당하고 기분 나쁜 대접을 당하고도 남에게 잘할 자신이 없어서다. 미래에 나타날 내 며느리를 온전한 인격으로 대하려면 난 나를 곱게 곱게 보존해야 할 것 같았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만나면서 살아도 짧은 인생이다.


나는 내 시가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들 앞에 안 간다.

너무 행복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며느리의 도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