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댁에서 살았던 기억은 띄엄띄엄이지만 한 번 가면 적어도 한 해 두해 정도는 얹혀 살았던 것 같다. 지금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서 옛 흔적이 없지만 왕십리 산동네에 있었던 외가댁은 어린시절의 추억이 있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낳은 육남매 중에 맏딸이었다. 막내남동생과 14살이나 차이가 나는 큰누나로 어린나이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에서도 일했고, 버스안내양도 하면서 집안에 경제력을 보탰다고 했다. 큰 딸이 잘 좀 살았으면 좋으련만 허구헌 날 룸펜같은 남편과 싸우다가 두드려 맞고, 툭하면 어린 남매를 맡기고 돈 번다고 객지로 떠나버리니 외할머니의 고충은 심했으리라본다.
한글도 읽지 못하던 외할머니는 성당에서 가르치는 한글교실에 등록해서 다니며 까막눈을 면했다. 외할머니와 얼굴을 맞대고 밥상을 펴고 앉아서 공부를 함께 하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국민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내 숙제를 했고 할머니는 한글 단어 받아쓰기 시험공부를 했다. 내가 읽어주면 할머니가 받아적는 연습도 했을 때, 자신의 자리잡지 못한 서툰 한글 필체가 삐뚤빼뚤한 걸 부끄러워하는 할머니의 웃는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외할머니가 유난히 신경질을 부리며 나를 말리던 일이 있다. 밤에 똥을 누지 말라는 거였다. 밤에 똥을 누고 속을 다 비우면 내일 엄청 배가 고프다며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꽤나 자주 혼났다. 외할머니 말대로 배설을 안하고 참고 그냥 아침까지 잔다고 한들 배가 안 고프지도 않았을 건데도 말이다.
가방끈 짧고 키도 작은 외할머니는 그 작은 체구로 여섯명의 아이를 낳고 가난한 살림을 떼우고자 파출부일을 나가셨다. 외할머니댁에 살면서도 나는 할머니가 저녁에 돌아오실 때까지 연탄불도 살피고 쌀 씻어서 밥도 앉히는 일을 가끔 했지만 미혼이었던 삼촌도 있고 예쁜 이모도 있는 외가댁은 나름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