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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빽언니 May 18. 2019

내 딸은 나처럼 살지 않기를

엄마의 기도

결혼 전에 나는 내 배우자감으로는 다른 조건 다 필요 없고 '손지검 하지 않는 남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뭐 그런 걸 조건으로 내세우냐고 웃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내 배우자가 순하고 착하기를 기원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아내를 때리는 사람이 아니기만을 바랬다


반드시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도 없었고, 혹여 돈을 별로 못 버는 남자면 내가 벌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딱 그런 남자를 만났다. 내 남편은 아내에게 손지검도 욕도 야라고 부르지도 않는 순한 사람이며, 그리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고 나를 외롭게 하고 놀기 좋아하는 남자다.  


생각대로 된다는 걸 진작 알았다면, 이루어질 줄 알았다면 더 구체적으로 희망사항을 추가할 걸 그랬다 싶다. 강남에 40평대 아파트 사 뒀다고 언제든지 걱정 말고 한국에 들어오라고 말하는 돈 많고 인자한 시부모. 돈 펑펑 벌고 아내를 공주처럼 호강시켜 주면서도, 아이들을 좋아해서 아들딸 섞어서 네 명은 낳자고 허구한 날 달려드는 배우자. 머리 좋고 집중력 좋아서 전교 1,2등만 하면서도 운동도 잘하는 아들내미. 미스코리아 뺨치게 늘씬하고 착한 몸매를 한 미모로 총명하기까지 한 딸내미 등등 디테일하게 바랄 걸 그랬다.

      

남들이 들으면 배우자감에게 바라는 게 왜 그것뿐이었냐고들 하겠지만, 가정폭력이 거의 매일 있던 가정에서 자란 나에게는 그게 진짜 중요했다. 일상 속에서 엄마와 아빠가 때리고 싸우는 걸 거의 매일 보고 자란 나는 그런 환경 속의 내가 싫어지기까지 했다. 자존감이 약해지기도 한다. 내 잘못도 아닌데 내 집구석이 쪽 팔려서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녔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난 내성적이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힘들어하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치고받고 싸우는 엄마 아빠가 내 부모라는 것도 싫었다. 손지검을 하는 남편임을 알면서도 지지 않고 항상 목청 높여 성질 돋우는 엄마도 징그럽게 이해가 안 갔다. 심지어는 때리는 아빠보다 마지막 한마디를 퍼붓지만 않았다면 엄마가 한대라도 덜 맞았을 텐데 바보같이 군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자식을 행복하게 해 주지도 못하고, 잘 기르지도 못할 거면 진작 나를 입양이나 보내줄 것이지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학교 파하고 집에 가기가 싫을 때가 많았고, 매일매일이 두려웠다. 오늘 밤은 무사히 조용하게 잠을 자고 하루를 넘길 수 있을까 조마조마했다. 싸움 말리다가 울다가 퉁퉁 부은 눈으로 다음날 아침밥을 굶고 학교 가기가 일쑤였다.   


구렁이가 지나가고 있는 것처럼 시퍼렇게 멍들어 있는 엄마의 얼굴과 팔다리를 자주 보면서 자랐다

집주인들이 싸우는 소리를 싫어하니 우리 가족은 월세를 살면서도 쫓겨나서 메뚜기처럼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다.  국민학교만도 여러 곳을 다녔기에 어린 시절 진득하게 사귄 친구도 하나 없다

  

그랬다. 부모들이 때리고 싸우면서 일상을 지내는 것을  항상 지켜보면서 사는 것은 우울하다. 가끔 뉴스에 나오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엄마를 구하느라 아버지를 찔러 죽인 아들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남동생이 힘 있는 고등학생이 되어서 아빠의 팔을 꽉 잡아 꺾을 수 있어졌을 때부터 아빠의 폭력은 현저하게 줄었던 것 같다. 의기양양해진 엄마는 아들이 있을 때만 아들 뒤에 숨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고 아빠는 새로운 힘의 눈치를 보며 점점 초라해져 갔다.


난 아직도 정확하게 이해가 안 간다. 내 부모는 왜 그렇게 날마다 때리고 싸웠을까

아빠가 왜 그렇게 엄마를 때려야 했을까? 엄마는 그렇게 살면서도 왜 남편을 멋지게 떠나지 못했을까?

서로의 첫사랑이랑 결혼했다면서 그것까지도 사랑이었나? 잘 모르겠다  


내 남편은 어찌 보면 땡잡은 행운의 남자다. 다른 거 다 못해도 마누라만 안 때리면 다 용서받게 간택된 남편인 셈이다. 결혼초 친구들이니 후배 들이니만을 챙기며 지 노느라 바빠서 처자식이랑 시간 보내는 일 거의 없었다.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라면밖에 못 끓이고, 담배는 골초다. 회사가 경기를 타고 간당간당해도 한숨만 쉬고 대책 없이 스트레스만 받는 무기력한 남자다.  한 때 남편의 자유분방함과 무책임함이 싫어서 이혼하네 별거하네 사네 안 사네 했었다. 차라리 서로 주먹질하고 이단옆차기라도 해가며 내 부모처럼 한 바탕 싸워야 속 풀이되겠다 싶은 인간이었다. 그냥 헤어질까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철없는 남편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엄마는 " 네가 선택한 애니까 헤어지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런데 니 남편이 사람은 착하잖아. 사람이 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데... 바람 부리고, 계집 패고, 놀음하는 거 아니면 남자들 다 비슷비슷하니까 참고 얼르고 달래면서 잘 살아봐라" 고 하셨다. 황송할 것도 없는 데도 "매 맞지 않는 아내" 라는 것만으로도 난 나에게 주어진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6남매의 가장 큰 누나였던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엄청 매를 맞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동생들이 뭔가를 잘못하면 큰 년이 잘못해서 그런 거라고 빗자루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리타작하듯 때리는 외할머니 때문에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고 했다.


우리 엄마는 왜 나를 그렇게 때렸는지 참.... 
머리통이 터지도록 맞은 적도 있어.. 
누가 그러더라고, 딸을 때려서 기르면 시집가서도 서방한테 맞는다고.... 
그래서 내가 그렇게 니 아비한테 맞았나 봐. 
난 그래서 너를 한 대도 안 때리고 길렀어

그 날밤 나는 엄마가 불쌍해서 밤새 울고 또 울었다.


가방 끈 짧은 엄마처럼 안 살겠다고 기를 쓰고 대학 가고 유학 가서 대학원도 다니고, 엄마 골 빼먹으며 살았으면서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주둥이질로 엄마 가슴에 대 못 박던 게 나다. 엄마랑 다르게 살겠다고 엄마가 좋아하는 옥수수도 떡도 일부러 안 먹었던 나였다. 나는 나만 안쓰럽게 살고 나만 노력한 줄 알았다.


아니었다. 내가 했다는 노력은 쥐뿔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딸에게 함부로 하면 내 딸이 시집가서도 대우 못 받고 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엄마가 온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막아주고 견뎌 준 세월 덕을 내가 보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에너지 넘치는 내가, 그래도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못났지만 순한 남편과 아들 하나 키워내고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지금까지 사는 건 나 혼자만의 노력만이 아니었던 거다. 딸을 아끼고 존중하면서 이 악물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주겠다고 깨닫고 노력하며 살아온 엄마의 용기이자, 오랜 세월 참고 인내했던 내 어머니의 소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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