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재로서의 의료 전문성과 네트워크
우리 디지털 헬스케어 파트너스 (이하, DHP)는 여러 의미에서 상당히 특이한 엑셀러레이터이다. 특히 스타트업에 제공하는 가장 큰 가치가 투자금이나 일반적인 경영 관련이라기보다는, 의학적인 전문성과 네트워크에 있기 때문이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이렇게 의료 전문가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되고 있는 헬스케어/의료 전문 엑셀러레이터는 찾아보기 어렵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엑셀러레이터인 Y-Combinator나, 우리가 벤치마킹한 디지털 헬스케어 전문 엑셀러레이터 (이제는 초기 벤처투자사로 바뀌었지만) Rock Health도 의료 전문성을 DHP만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단순히 참여하는 의사와 규제 전문가의 수만 놓고 비교했을 경우에도 그러하며, 의료 분야 내에서도 진료과별로 그 분포를 따지면 더욱 그러하다. 현재 DHP에는 파트너 중에만 의사가 9명, 명시된 자문가와 물밑에서 활동하시는 분들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수십 명으로 불어난다. 이런 곳은 필자가 알기로 세계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 전문성과 네트워크라고 하는 무형의 것이, 이를 받는 입장에서는 '받아보기 전에는' 가치를 느끼기가 어렵고, 특히 국내와 같은 환경에서, 초기 창업자에게 이를 기반으로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 DHP의 파트너이시자, 공동창업자이신 김치원 원장님께서 디지털 헬스케어 강의 때 강조하시는 말씀 중의 하나가, 의료/헬스케어 서비스는 '신뢰재'라는 것이다. 경험해보고, 사용해보기 전에는 그 가치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단 고객에게 믿고 사용하게 해야 하는데, 이게 참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그 고객이 해당 서비스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경험이나 전문성이 없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전문가 집단, 혹은 엑셀러레이터로서 DHP가 초기 스타트업에게 제안하는 전문성의 가치도 결국에는 비슷하다. 창업자 입장에서는 우리의 멘토링이나 자문을 받아봐야만 그 가치를 알 수 있는데, 받아보기 전에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우리가 네트워크가 넓다는 것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기는 할 테지만, 직접 경험해보기 전에는 우리 네트워크가 얼마나 넓은지 실감하기 어렵다. "저희 DHP를 통하면 국내 빅 5 병원을 비롯하여, 개원가/전문병원/요양병원 등 다양한 의료기관, 국내외 제약사, 보험사, 의료기기 회사, 규제기관 등에 모두 연결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 창업자 입장에서는 이게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지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DHP의 입장에서, 창업자의 경우는 대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 의학적으로 전문성과 네트워크가 충분한 경우
2. 그렇지 않은 경우.
1번 유형의 경우에는 사실 우리 DHP의 도움이 상대적으로 적게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스핀오프 한 회사의 경우 (내부 인력이나 자문단으로 의료전문가를 이미 많이 갖추고 있다면) DHP가 제공할 수 있는 전문성과 네트워크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적어질 수밖에 없다.
반면 2번의 경우에는 우리 DHP가 큰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대표의 입장에서는 '신뢰재'인 이 무형의 가치를 확신하기 어렵다는 것이며, 특히 비전문가일수록 우리가 제공하는 멘토링이나 조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즉, 우리의 도움을 가장 크게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정작 그 도움의 가치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딜레마다.
한 달에 한 번 진행하는 DHP Office Hour는 우리 DHP의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행사라고 할 수 있다. 2-3팀의 초기 헬스케어 스타트업을 초청하여 우리 파트너와 자문가들이 한 시간씩 자문을 해드리는 행사이다. 여기에는 무려 20-30명의 의료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오직 하나의 스타트업을 위해서 엄청나게 인텐시브 한 자문을 '무료'로 해준다. (이 자문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는 어렵겠지만, 필자 혼자 대기업에 가서 한 시간 자문을 하고 자문료를 얼마나 받는지를 고려해보면, 나 같은 사람 30명에게 동시에 자문받는 비용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여기에서는 해당 기업이 개발하는 서비스/제품의 의학적 필요성, 향후 임상연구의 방향성뿐만 아니라, 의료계와 병원, 환자의 특성을 고려하여 어떤 BM이 가능/불가한지, 병원/환자/의사들은 이걸 구매할지, 의료기기 인허가는 어떻게 받을지, 보험수가를 받을 수 있을지, 한국에서는 불법은 아닌지, 해외에서는 가능한지, 더 나아가서 구체적으로 어느 병원의 누구에게 컨택해야 하는지까지 조언해준다. 여기에서 운이 좋으면 참석한 의사나, 병원, 보험사, 제약사 등과 바로 연계되어 추가적인 미팅으로 이어진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런 곳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드물다.
특히 이 '무료 자문' 세션은 우리가 투자하고 싶은 스타트업을 고르고, "우리 DHP에게 투자와 엑셀러레이팅을 받으면 이러한 자문을 일상적으로 받을 수 있고, 이 네트워크를 모두 활용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설득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또한 스타트업의 입장에서도 DHP의 이러한 전문성과 네트워크를 느껴보고, 우리 포트폴리오가 되면 좋을지를 따져보는 기회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조언을 쏟아내면서도, 마음 한편에 드는 불안감은 '이 조언과 네트워크의 가치를 대표님께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이 이야기가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지 알고 계실까?' 하는 것이다. 의료 산업은 알면 알수록 어렵다. 경험이 없고, 전문성이 없을수록 이 분야가 아주 만만해 보인다. 무식해서 용감하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만큼 이 의료 산업의 복잡성과 특수성, 때로는 보이지 않는 이해관계, 역학관계를 이해하는 것에 전문성과 안목,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대표님께서 이러한 의료 산업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드리는 조언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투자자/엑셀러레이터와의 deal 경쟁에서 질 수밖에 없다. 특히 (전문성 같은 것 따위는 없더라도) 더 많은 투자금과 더 높은 기업가치를 약속하는 경쟁사에게 말이다.
올해도 사실 DHP가 투자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사례가 적지 않다. 우리가 투자 제안을 하는 회사는 그리 많지 않은데, 이렇게 거절을 당할 때마다 속이 쓰린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투자 제안을 거절당하는 이유는 우리가 제안하는 기업가치나 투자금이 대표님 입장에서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작금과 같이 돈이 많이 풀린 시장에서는 기업가치를 더 높게 쳐주는 투자자에게 창업자는 더 끌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투자금이라는 유형의 가치만 보고, DHP에서 투자금과 함께 따라가는 수십 명의 의료 전문가의 전문성과 네트워크라는 무형의 가치는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쩌랴. 이게 다 신뢰재인 것을.
우리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투자하고 싶은 좋은 회사를 놓치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회사가 나중에서야 찾아와서 "파트너분들께서 예전에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 알았습니다. 그때 하셨던 이야기를 이해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하는 후회를 뒤늦게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일이 생각보다 더 비일비재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문제를 더 해결하기 위해서 DHP에서는 몇 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첫 번째는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그냥 앞으로도 꾸준히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한 가지는 평판이고, 다른 하나는 포트폴리오다.
이 바닥에서 평판을 쌓고 이름을 알리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이름이 알려지기 위해서는 결국 크리티컬 포인트를 넘어야 한다. 그 전에는 아무도 그 이름을 모르다가, 어떤 임계점을 넘으면 이 바닥의 모두가 이 이름을 알게 된다. 그 지점이 올 때까지는 그냥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 최근 오피스아워는 오히려 의료계에서 이름이 알려지며, 더 많은 의료인들이 참여를 원하셔서 문의를 하고 계시다. 앞으로 오피스아워는 더욱 발전할 것이다. 이렇게 준비가 되면 스타트업의 참여도 점차 늘 것이다. 우리의 방향성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은 있다.
그리고 느리더라도 좋은 기업에 투자하며 포트폴리오를 계속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포트폴리오, 즉 우리가 기존에 투자한 기업들의 구성은 결국 우리 DHP가 지향하는 방향성이 무엇인지, 실제로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백 마디 말보다, 혹은 브런치에 백 번 글을 쓰는 것보다, 실제 투자와 육성한 트렉 레코드를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좋은 기업에 투자하고, 그 스타트업이 잘 성장하도록 도와준다면, 자연스럽게 다른 창업자들도 우리의 투자를 받고 싶고, DHP 패밀리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따로 홍보하지 않아도 스타트업들이 저마다 YC의 포트폴리오가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사실 우리는 자신이 있다. 우리의 신규 투자를 받기를 망설이는 스타트업을 설득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우리 포트폴리오 대표님께 연락해서 물어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 어떻게, 얼마나 도와주는지 가장 잘 아는 분들이 이미 투자를 받으신 대표님들 이시니까. 어떤 경우는 내가 설득하는 것보다, 우리 포트폴리오 대표님의 진솔한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다. 다행히도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 과정을 거치면 대부분의 딜이 잘 풀렸다.
사실 우리 포트폴리오의 수는 아직 적기 때문에 더 늘려 나가야 하며, 모두가 창업 초기인 현재의 포트폴리오 회사들도 더욱 발전해야 한다. 여기에는 역시 시간이 걸린다. 결국 우리가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늘 그랬듯이 앞으로도 계속 묵묵히 수행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두 번째는 조금 더 큰 규모의 펀드를 만드는 일이다. 아무리 가치 있는 전문성과 네트워크를 제공한다고 해도, 유의미한 투자금을 제공하지 못하거나, 시장 상황에 맞지 않게 기업 가치를 너무 후려치는 것은 딜의 성사를 떠나서, 스타트업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사실 지금의 시장 상황은 반대로 기업 가치에 너무 인플레가 심하다)
지금까지 우리의 가장 큰 약점 중의 하나가 펀드가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고민 끝에, 현재 DHP는 펀드를 만들기 위해서 기업 LP를 모집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 돈이나 받지는 않으려고 한다. 너무 까탈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돈에도 꼬리표가 있다고 믿고 있다. 평판이 좋지 않은 LP가 출자한 돈을 우리 스타트업에게 투자하는 것은 오히려 그 스타트업에게 해가 되는 경우도 있다.
(초기 스타트업 대표들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어떤 펀드의 재원으로 투자를 받을 때 그 펀드의 돈이 어느 LP에서 온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언론 지상에 나오는 혹은 업계에서 공공연하게 알려진 갑질 회사, 관계사나 직원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하는 회사, 의료계에서 평판 좋지 않은 회사에게 나온 돈을 받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 이런 LP의 돈을 투자받았던 것 때문에 잘 진행되던 M&A 딜이 무산되는 경우도 보았다.)
DHP가 바라는 것은 결국 LP(출자자), GP(운용사), 피투자사(스타트업)가 모두 어우러질 수 있는 생태계다. 우리가 벤치마킹했던 미국의 Rock Health는 그렇게 하고 있다. 주요 LP가 카이저 퍼머넌테 등의 대형 보험사와 다국적 제약사 등이다. 내부 생태계에서 출자한 펀드를 운용하면서, 스타트업에게 투자할 수 있으면, 스타트업은 단순히 돈과 DHP의 전문성/네트워크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협업이나 exit 가능한 파트너를 초기부터 확보하는 것이 된다.
아직 한국에서 헬스케어 스타트업 사이에서는 이러한 생태계, 혹은 선순환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를 우리 DHP가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아직 공개하기에는 이르고, 규모도 크지 않지만 조금씩의 성과는 있다. 이 분야는 급하게 서두른다고 해서 일이 되지는 않는다. 헬스케어도 그렇고 스타트업 투자도 그렇다. 조금씩 작지만, 하지만 유의미한 시도와 성과를 계속 만들어 가려한다. 이 과정에서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아직 부족함이 많은 초보 엑셀러레이터와 초보 경영자에게 도움을 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