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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스틸러 Dec 07. 2018

앞으로 가지도 뒤로 가지도 못하는 순간

천천히 걷기

머릿속이 가득 차올라 더 이상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있다. 마치 무엇인가가 그릇에 넘치듯 담겨 그릇의 표면을 볼록히 뛰어넘어 버린 상태와도 같다. 이런 순간에 놓이면 나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순식간에 얼어붙어 버린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순간이다.

'왜 이러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무기력한 나의 모습이 싫어진다. 미래의 숨겨둔 행복을 찾기 위해 무엇인가 쉬지 않고 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이 만들어준 미움이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토닥여주기 전에 미래의 나의 편에 더욱 가까이 서 있는 듯하다. 불확신 한 미래가 낳은 걱정으로 아무리 다그쳐 보아도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알았어. 좀 쉬었다 가자."

뒤늦게 한층 예민해져 있는 나를 잔잔한 노래와 공감 어린 글들로 달래어 본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이 넘칠 듯 가득 차 버린 나는 그 어떤 구원의 손길도 반갑지 않다. 지금 이 순간 나를 향한 모든 관심과 행위들은 그저 부담일 뿐이다. 높은 산을 오르다 중턱 어디쯤 주저앉아 버린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멈춰진 시계 위에 나"

불안한 마음으로 멈춰서는 안 될 것만 같은 현실 위에 놓인 러닝 머신을 멈춰 세워본다. 큰일이 날 것만 같았던 우려가 민망할 정도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고요하고 모든 것이 뚜렷해지며 더욱 선명해지는 것만 같다. 아름다운 꽃, 잔잔한 바람, 따사로운 햇살들. 지금까지 오랫동안 함께 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이 그제야 고개를 내밀며 자신의 존재를 하나 둘 들어내기 시작한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낯선 순간은 과거의 치열했던 순간들이 거짓이라 말한다. 빈틈없이 빼곡했던 과거와 조금은 느슨해진 지금 중 누구의 손을 들어 줄지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평온한 나의 모습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흐르는 강물"

텅 빈 시간은 거품이 내려앉듯 나에게도 여백을 선물해 주었다. 얼어 있던 강물이 다시 흐르고 예전과 같이 시곗바늘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스쳐 지나간 휴식은 한낮에 달콤한 꿈만 같이 느껴진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다. 그저 바뀐 것은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볼 줄 알고 때로는 멈춰 설 줄도 아는 나 자신뿐이다.


나는 다시 나아갈 것이고 또 멈춰 서야 할 것이다.  

이런 과정의 수없는 반복이 삶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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