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그렇지.
오랜만에 친구녀석들과 만났다. 고등학교때 같은 반이던 우리는 삼총사로 불리웠다. 아마도 집에서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학창시절의 거의 모든 날들을 함께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그 시절의 우리는 찌질했다. 하지만 소중한 기억이다.
이제는 어엿한 직장인인 우리 셋은 제법 비싼 펍에서 모였다. 학창시절엔 만원에 안주가 여러개씩 나오는 곳에 가거나, 슈퍼에서 술과 안주를 사다가 어디든 자리를 찾아서 먹었는데,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될 정도의 경제력이 생겼다. 직장인의 비애가 더 많은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지인들과 좀 더 맛있는 걸 먹거나, 좋은 곳에 올 수 있음에 그래도 만족하고 사는게 보통의 삶이겠지 싶다.
창덕이 녀석은 살이 많이 쪘다. 나이살이라고 우기고 있는데, 어림도 없는 소리다. 이제 겨우 30대 초반인 우리가 나이살을 운운할 때눈 아니지 않은가?우린 아닌데 왜 너만 나이살을 먹었냐고 핀잔을 주니 자기가 생일이 제일 빠르기 때문이란다. 그래 니가 주둥이는 우리중에서 제일 잘 놀렸지.
경현이는 우리들 중에 가장 먼저 직업을 구했다. 그땐 가장 먼저 자유를 잃은 녀석을 우리가 종종 위로해주었다. 그때는 경현이가 엄청 잘못된 사람들이 가득한 회사에 취직한 것만 같았고, 야.때려쳐.라고 수없이 말해줬다. 지금은 창덕이도 나도 잘못된 사람이 가득한 그런 회사에 다니고 있고, 경현이는 우리보다 받는 돈이 훨씬 많다. 전세가 역전된 기분이다.
그러고보니 옷차림도 직장인스럽기 짝이 없다. 셔츠에 정장바지 그리고 구두와 서류가방. 문득 고등학생때 어른처럼 보이겠다고 한껏 세미정장을 빼 입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풉. 대학생이 되고 나서 그런게 차려입은 고딩들이 어찌나 한심해 보였던가. 개구리 올챙이적 모르고 그랬다. 이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는 걸 보고 있으니 소위 말하는 아저씨가 되어가나 싶다. 아. 물론 아직 우린 총각이다. 심지어 솔로다. 뭐..그렇다.
옛날 추억을 안주 삼아 위스키를 홀짝홀짝 들이키고 있는데, 창덕이가 뒤쪽을 보라며 신호를 줬다. 경현이와 고개를 돌려보니 미녀3명이 있었다. 아까부터 봤는데, 들어오더니 가게 안을 쭈욱 훑어보더니 자신과 눈이 맞았는데 피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마치 학창시절의 헌팅에 대한 욕망을 재현해 볼 그런 타이밍이라고 창덕이는 생각하고 있었다. 옷차림도 센스있어 보인다며 꽤 괜찮은 기회 같으니 한번 해보자며 우릴 꼬드기고 있었다.
역시 이런것에 와서 술을 마셔야 뭔가 이벤트가 발생하는 건가? 그러고보니 우리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적당한 경제력과 그래도 패션테러리스트는 아니니깐 말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입담의 제왕, 언어의 마술사 창덕이가 있다.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는데 살짝 타이트한 흰 원피스를 입은 일행중에 한명이 우리 테이블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정말로 창덕이의 눈빛이 그녀와 통한거란 말인가? 직장인이 되면 이렇게 쉽게 만남의 기회가 오는 건가? 아니지, 그동안은 그런일이 없었으니, 혹시 꽃뱀 뭐 그런 건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고민을 하면서도 어느새 우리 셋의 자세는 점점 반듯해지고 있었다. 나와 경현이 뒤에 선 그녀가 창덕이에게 말했다. 나와 경현이는 우리의 미래를 창덕이의 세치 혀에 걸었다.
저기 세분이서 오신건가요?
네, 그런데요.
그럼, 의자 하나 가져가도 되죠?
그렇게 우리 셋은 밤이 깊도록 지난 여자들과의 찌질했던 추억을 안주 삼아 마시고 마시고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