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다녀올게

단편소설 5화

by 김설원

여객선이 선착장에 닿았을 때 외연도의 햇살이 참 곱구나, 생각했는데 어느새 날씨가 우중충해졌다. 이쪽저쪽에서 거칠게 불어대는 바람이 햇살을 모조리 걷어내는 듯했다. 웨스트프론티어호 선장이 결항 운운할 때는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설마…… 하면서 듣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이런 기세로 바람이 몸집을 키운다면 바다도 차분히 있지는 않겠다 싶어 수란은 싱숭생숭해졌다. 결항이라는 의외의 복병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을 테니까.

외연도는 섬이라기보다 소박한 마을 같은 인상을 풍겼다. 섬이라고 하면 바다, 바위, 바닷새들이 떠오르면서 고즈넉한 이미지로 다가왔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집집마다 걸어둔 ‘민박’ 이라는 간판만이 섬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줬다. 어느 순간 엄마의 니트 모자가 훌러덩 벗겨졌다. 수란은 무심코 엄마를 쳐다봤다가 가슴이 철렁했다. 순식간에 모자가 날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엄마의 머리 때문이었다. 숱이 적은 엄마의 머리카락은 누군가가 밟고 지나간 검은 잡초 같았다. 엄마의 해쓱한 얼굴을 더욱 병자처럼 보이게 만드는 끈질긴 잡초.

“머리카락이 눌려서 우스워 보이니까 머리를 좀 매만져 봐.”

엄마는 대꾸 없이 수란의 손에 들린 니트 모자를 낚아채 가듯 가져갔다. 그 손에서 뭔가 서운한 감정이 느껴졌다. 뺑덕어멈은 저만치 걸아가고 있었다. 엄마가 그 뒤를 빠른 걸음으로 쫓아갔다.

섬마을은 적막했다. 날이 추워서 다들 집에 푹 잠겨 있는지, 아니면 새해를 맞아 너나없이 섬을 떠났는지, 길을 걷는 사람은 세 여자뿐이었다. 집집의 텃밭에 가득한 배추나 파에서 어떤 인정이 느껴졌다. 어느 마당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것 같은 친근한 마음.

“이쪽으로 쭉 올라가면 바다가 보일 거예유. 전망이 기막혀. 근처에 약수터도 있구유. 거기서 소나무 길을 따라 걸으면 우리 민박이 보일 거예유. 천천히 놀다 와서 저녁 먹어유. 해물잡탕 괜찮지유?”

뺑덕어멈의 말이 끝날 때쯤 엄마가 가까이 다가왔다. 니트 모자를 빼앗아 쓰고는 앞서 걸어간 엄마를 수란이 이내 따라 잡았다. 보폭을 맞추며 엄마의 걸음을 존중해줄 수도 있었으나 무시했다. 분명 Q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듬직한 Q가 곁에 있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결국 가슴에 분노만 남았겠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추석, 설, 생일, 연말연시에 돈과 시간을 들여 얼굴을 보이면 엄마의 표정은 오묘한 빛깔로 변했다. 수란에 대한 고마움과 Q에 대한 분개가 뒤섞인,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표정. 그 속마음을 알고도 남지만 솔직히 불쾌했다. 그때마다 Q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왕래가 끊어졌어도 내심 그리워했던 Q를 다시 만나게 해줄 테니까요.

“여기서 살면 굶어 죽지는 않겠다. 오다 보니까 땅에 먹을 게 널렸데. 고깃배가 들어올 때 선착장에 나가면 쭈그렁이 생선도 얻을 수 있겠고.”

엄마가 혼잣말 하듯 말하면서 길을 줄여갔다. 수란은 엄마의 뒤를 따랐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자잘한 돌멩이들이 돌돌돌 굴러 내려갔다. 두 여자의 발길이 단잠을 깨운 것처럼. 블로거들이 찍어 올린 사진 속 외연도는 해가 이울 즈음의 풍경이 근사했다. 대개 봄에 방문해서 찍은 사진들이었는데, 노을이 불타오르는 등산로의 정상, 그곳에서 바라보는 항구의 등대가 성찬처럼 식욕을 돋게 했다. 어떤 블로그에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진이 동백꽃이었다. 동백나무에 무슨 빨간 열매처럼 알알이 맺힌 꽃이 숲속에서, 또 집집마다 피어났다. 외연도에 가야만 동백꽃을 볼 수 있다는 듯 신비로운 모양새로. 하지만 실물은 달랐다. 동백꽃은 피지 않았고, 조금씩 누렇게 물들어가는 하늘이 마치 삼베옷을 펼쳐놓은 것처럼 보였다. 머리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게 해서 시야를 가로막거나 흐리게 하는 짓궂은 바람이 풍경마저 흩트리는 것 같았다.

keyword
이전 04화잠깐 다녀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