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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서쪽 나라로 가고 싶어

단편소설 1화

by 김설원

피겨스케이팅 선수의 허벅지에 글자를 새긴다. 삐뚤삐뚤한 문장이 발목까지 이어진다. 마치 개미떼 같다. 그녀는 오른쪽 다리를 뒤로 완전히 들어 올려 두 손으로 스케이트 슈즈를 붙잡고 있다. 스케이트의 날에 초점을 맞춘 그녀의 얼굴이 일자로 뻗어 올린 다리만큼이나 팽팽하다. 심이 굵은 볼펜으로 테두리를 그어본다. 납작한 가슴을 시작으로 골반과 종아리를 지나 엉덩이를 거쳐 겨드랑이에 이르자, 빙판의 발레리나가 커다란 ‘9’자로 변한다.

난이는 스포츠신문을 밀쳐 놓고 반소매 유니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 낮에 시아버지의 방을 청소하다가 자개문갑에서 상자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남편이 근무했던 회사의 유니폼이 들어 있었다. 단추가 떨어진 채 반듯하게 개켜 있는 유니폼은 반소매였다. 택배회사의 유니폼에서 남편의 체취가 맡아진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시아버지의 새카만 머리털이 눈에 들어온다. 당신은 방문을 반쯤 열고 불을 켜놔야만 잠이 든다. 며칠 전 새것으로 갈아 끼운 형광등 때문에 시아버지의 뒤통수가 더욱 새카맣게 보인다. 그것은 들숨날숨을 느리게 반복하는 검은 생명체 같다. 왕겨를 넣어 만든 원통형 베개가 시아버지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받치고 있다.

난이는 시아버지의 머리를 살짝 들어 올려 베개를 밀어 넣는다. 주름투성이의 흐물흐물한 눈꺼풀이 힘겹게 열린다. 희미하게 웃더니 당신은 이내 잠 속으로 빠져든다.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네의 머리털은 염색한 것처럼 까맣다. 머릿결도 매끄럽다. 세월의 파도에 씻긴 육체는 나날이 섬약해지는데 머리털만은 생생하게 자란다. 시아버지는 <달맞이 가자>를 부르다 잠이 들었다.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쯤에서 끊겼을 것이다. 일본 노인들의 장수 비결을 소개한 프로그램을 시청한 뒤부터 시아버지는 동요를 불렀다. 올해 아흔네 살인 이노우에 노인은 잠들기 전에 반드시 스무 곡의 동요를 부른다고 했다. 조각구름 같은 백발을 올백으로 빗어 넘긴 이노우에 노인은 허리가 꼿꼿했다.

“얘, 이 공책에 동요 가사를 적어다우. 글씨를 큼직큼직하게 써라. 공책 뒷장에는 쓰지 말고 앞장에만 한 곡씩. 무슨 말인지 알겠쟈?”

다음날 시아버지는 칸이 넓은 초등학생용 공책을 사들고 왔다. 이노우에 노인의 건강 비법을 따라하면 백 살을 너끈히 넘길 자신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의욕이야 넘쳤지만 시아버지는 언제나 여덟 번째 곡 <달맞이 가자>를 부르다 잠이 들곤 했다.

휴대전화의 벨소리가 적막을 가른다. 진동으로 설정해 놓는다는 걸 깜박했다. 한 번 울리고 그친 벨소리, 경모가 보내는 신호다. 식탁에 앉아 있던 난이는 뒤꿈치를 들고서 재빨리 제 방으로 들어간다. 전화벨 소리가 마치 위급 상황을 알리는 경보음처럼 들린다.

“왜 밤에 신호를 보내고 그래.”

난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불만을 터뜨린다.

“남방을 손으로 빨았는데 그 다음엔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빨았으면 물기 빼고 탈탈 털어서 널면 되지. 세탁기 고장 났어?”

“세탁 방법을 보니까 반드시 손으로 빨라고 하잖아. 탈수기도 사용하지 말래.”

“그렇게 까다로운 남방을 왜 사 입어.”

“너한테 선물 받은 남방이야.”

당장 들어와 살 것도 아니면서 잔손이 가는 남방을 사줬다고, 경모가 입맛을 다시며 툴툴거린다. 며칠 뜸하다 했다. 그는 올해 정월 초하루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걸어 달콤한 목소리로 잃어버린 낙원 운운하며 난이를 꼬드겼다. 그러다가도 벌컥 성질을 내서 심심찮게 말다툼을 했다. 그 구애가 저번 주부터 잠잠하다 했더니 오늘 살아난 것이다. 경모는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꾼 것 같다.

시아버지가 뒤척인다. 경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보다 옆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더 또렷이 들린다. 시아버지는 오글쪼글한 눈꺼풀을 활짝 열고서 이쪽의 대화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아버지를 의식한 난이의 음성이 점점 작아진다. 난이는 입술의 거스러미를 떼며 경모가 어서 물러나기를 바란다. 손톱에 피어난 꽃송이는 생기가 없다. “손톱에서 꽃향기가 맡아지는 것 같지 않아요?” 라고 묻던 네일숍 아가씨의 과장스런 표정이 떠오른다. 꽃향기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꽃처럼 생겼어. 그러니 반값만 받았겠지.

“뭐라고 구시렁대는 거야.”

“아파트 상가 안에 네일숍이 문을 열었어. 오픈 기념으로 세일을 한다기에 손톱을 맡겼는데 볼수록 별로야."

"지금 네 마음 상태가 그렇다는 뜻이지. 뭐든 마음의 창으로 보이는 법이니까."

난이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피피’ 라고 한다. 경모가 지어낸 사랑한다는 뜻의 암호다.

“그만 떠들고 꺼져라 이거지."

경모의 목소리가 대번 누그러졌다. 그가 내일 아침 일찍 깨워달라는 말을 남기고 마침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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